KBB_SCHOLAR_문학과 '법과 정의' 의 관계
원본 파일:
KBB_SCHOLAR_문학과 '법과 정의' 의 관계.pdf
변환 일시: 2026-04-09 22:43
1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75
문학과‘법과 정의’의 관계*
57)한스 에리히 노싹(Hans Erich Nossack)*
윤 재 왕 옮김**
문학이나 문학자는 결코 법과 정의를 직접적인 테마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들이
개별 법조문이나 사형제도에 대해 어떤 입장을 표명할 때에는, 문학자로서가 아니
라 한 시민으로서 또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내
가 무슨 일로 세무서와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이는 문학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납세자로서의 역할 때문이다. 내가 평범한 세무서 직원에게 문학에는 부가가
치세라는 개념이 없다고 설명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문제와는 상관
없이 나는 어쨌든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또는 내가 수표를 위조한 사실이 발각되
어 재판을 받게 되어 법정에서 내가 몇몇 유명한 책을 쓴 소설가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한다면, 담당판사가 나를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조치
를 취할 것이다. 그런 식의 행태는 책을 쓰는 사람은 바로 책을 쓴다는 사실 때문
에 무언가 비정상적인 사람에 속한다는 상투적인 사고방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 문학자들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
받기를 바랄뿐더러, 어쩌면 법률이나 경찰명령 또는 여타의 안전조치 등과 같이
흔히 확립된 제도(Establishment)라고 부르는 것들을 신뢰하는 동시대인들보다도
더욱 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희망한다.
나의 강연주제와 관련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 즉 흔히 ‘아우슈비츠’
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문제에 대해 곧바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른바 ‘아우슈
비츠’ 소송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심리적 거부감은 처음부터 이 문제는 결코
- Das Verhältnis der Literatur zu Recht und Gerechtigkeit, 1968, Mainz. 지은이 노싹(1901-1977)은 함부르 크 태생의 작가로서, 1920년대에 예나(Jena) 대학교 법학과를 다니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경험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는 법적인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이 번역문은 노싹이 1968년에 마인츠 학술 및 예술원에서 행 한 강연으로서, 문학과 법의 관계에 관한 근원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노싹의 작품 가운데 국내에 소개된 것 으로는 『늦어도 11월에는(Spätestens im November)』이 있다. **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페이지
276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몇몇 사람이
더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나찌 치하의 비인
간적인 법률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사실을 내가 번연히 알고 있는 자들이 아주
고액의 연금을 수령한다는 실정에 나는 분노를 넘어 구역질을 느낄 정도이다. 하
지만 만일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공무원보수법과 연금법을 그때그때의 정치적 경향
에 따라 해석을 할 경우에는 이들 법률의 기반이 크게 뒤흔들릴 것이라는 사정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그저 이들 고액연금 수령자들이 잘 먹고 잘살고, 가능하면 빨
리 이 세상을 떠나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만일 내가 우연히 아이히만(Adolf
Eichmann –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자. 나치 패망 이후 아르헨티
나로 도주하여 은거하다, 뒷날 발각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다)을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행동을 조종할 어떤 원칙이 있을 수는 없다. 복수의 박테리아란 너
무나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증세를 심각하
게 만들 위험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측면은 결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기보존이라는 개인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복수는 결코 인간적인 반응이
아니라, 생물학적 반응일 뿐이며, 그래서도 더욱 위험한 것이다.
아주 단순한 보기를 들어 이 점을 설명해 보자. 모든 독재 치하에서 그렇듯이
1933년 이후 수없이 많은 밀고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유감스럽게도 여성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여성의 실천이성은
이들이 이데올로기의 선전에 유혹당하지 않게끔 보호해 준다는 내 젊은 시절의 믿
음 때문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이득이 걸
려있는 한, 남성이나 여성 모두 별다른 쓸모가 없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나
찌 독재 하에서 나는 늘 밀고자들을 다리미로 쳐 죽이고 싶었고, 그렇게 하더라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며, 나의 이런 행위가 법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따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종전
직후 점령군 당국은 이제는 우리가 밀고자들을 신고하기를 원했다. 점령군 측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는 식으로 논증했다. 하지만
우리들 대다수는 이 논증에 설득당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떤 고귀한 성품
때문에? 천만에! 아니면 밀고자는 밀고를 통해서만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모순을
냉철하게 고려했기 때문에? 그 역시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태는 본능에 따른
3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77
것이었다. 가족 내에서의 일은 가족 내에서 처리해야 하지, 경찰의 도움을 빌어 해
결할 일이 아니다. 만일 이 문제를 새롭게 변화한 사법부에 맡긴다 할지라도, 그건
우리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과거청산과 관련하여 종전
직후에 보인 즉흥적이고 어쩌면 돌발적인 행동들은 그 자체로서는 얼마든지 납득
이 가는 일이지만, 심각한 병세가 지나간 이후에는 그저 개인적인 복수심의 충족
이자 또 다른 비인간성을 뜻할 뿐이다. 우리가 뉘른베르크 재판을 우리 민족의 역
사적 과오로 느낀다면 좋을 것이다. 과연 그러한 과오가 독일민족의 성격상의 과
오인지 아니면 우리가 12년의 독재로 말미암아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문제 자체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힘이 없었던 것인지는 여기서 세세히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러한 현상을 목도하면서 얻게 된 인식에 기초하여 제정된 모든 법률은 나찌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의미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
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법률들이 과거의 비인간성에 대해 징벌을 가하
는 데 집중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비인간성을 방지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
는 점도 알아야 한다. 법률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지나치게 경직되며, 그 법
률 자체가 비인간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단 정의라는 개념은 제쳐두고 생각을 해보자. 문학에서 이 주제는 폰 클라이
스트(Heinrich von Kleist)의 『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에서 충분
히 다루어졌다. 어떤 개인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마치 광신도처럼 정의를 주
장하게 되면 곧장 부정의에 빠지게 된다. 일상 속에서도 사소한 일에서조차 정의
를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은 몹시 짜증스럽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극히 비현실적
이고, 그로 인해 부정의한 인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이라는 개념에 국
한시켜 얘기를 하겠다.
비단 오늘날뿐만 아니라, 전 시대에 걸쳐 문학은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관료주의 적대자들조차도 문학이 유토피아적 무정부주의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비난할 구실을 준 적이 없다. 문학은 사회적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보조수단으로
서의 법과 법률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문학은 법과 법률에 대해 아주 민감
하게 반응한다. 즉, 문학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제정된 법규범을 종국적인 것으로
여기고 이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게으름의 표
현일 뿐이며, 문학은 그러한 게으름의 결과로서 시대착오와 잘못된 금기 그리고
의미가 다 빠져버린 상징만이 횡행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
4페이지
278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분노의 눈길로 목소리를 높이는 문학자는 결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아주 면밀하
게 따져 생각해 보면, 의미가 빠져버린 상징들을 붙들고 있으면서 이를 권력의 수
단으로 이용해 먹는 자들이야말로 절대적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나찌 십자가, 민족, 종족, 피와 땅, 고향 따위의 개념들은 아마 천 년 전에는 타
당성을 갖는 개념이었을지는 모르지만, 1933년에는 학문적으로든 또는 20세기의
실제적인 삶의 조건에서든 의미를 전혀 갖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도 이들
개념들은 극히 원시적인 생물학적 본능에 호소하는 아주 효과적인 힘을 지녔다.
이는 정말 끔찍한 현상이었다. 그저 과거를 회고한다는 측면에서 끔찍한 현상이라
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런
타당성도 갖지 못하는 상징들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문의 헤드라인이나 대중화된 과학이 마치 무
엇인가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듯 사용하는 전문용어들, 그리고 무엇보다
정교한 심층심리적 기교를 구사하는 광고산업을 생각해 보라.
약간 웃기는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페르실(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세탁용 가루비누 상표) 소녀가 아주 말끔한 하얀 옷을 입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커다란 광고판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1933년 이후 어
느 날인가부터 광고판의 이 소녀는 양 손에 각각 아이 하나씩을 붙잡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전한 민족감정이라는 미명 하에! 최근에 어떤 광고전문가는 TV 광고
에서 우리에게 세탁비누를 선전하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는 반드시 결혼반지
를 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폭로한 적이 있다. 결혼반지가 신뢰의 상징이라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경험 많은 주부에게 내가 여행 중에 어떻게
내 와이셔츠를 빨아야 좋은지를 묻긴 하겠지만, 무슨 세탁비누를 써야 하는지는
나로선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식으로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의 센티멘털한 감
정을 자극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저 세탁비누산업에 맡겨 두기로 하자. 그 대신 우리는 문
학작품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가지 유사한 사례를 얘기해 보기로 하자. 전 세계의
문학자들은 검찰이 외설이나 신성모독을 이유로 어떤 책과 그 저자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면, 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좀체 보기 드물 정도로 서로 한 목소리로 반응을
보이곤 한다. 문학적 작품으로서의 성격 자체에 대한 판단은 우리 문학자들의 몫
이지, 결코 검찰의 판단대상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진짜 포르노는 원래
5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79
부터 은밀히 거래되기 마련이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이성적인 사
법부라면 이런 현실을 그저 묵인하기 마련이다. 어떤 문학자도 그런 포르노를 옹
호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문학작품이 아니며, 대개는 대중
잡지의 화려한 표지처럼 이내 싫증이 나게 만들고, 그저 벗은 몸뚱이라는 언사 밖
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최근에 하르니쉬(Harnisch)에서 벌어진 포르노 소송은
재판부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윤리개념이라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
터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습관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른바 ‘윤리’라는 것은 단지 현실적인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사용되
는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신성모독(독신죄)을 이유로 제기된 공소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한 종교공동체
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처참한 모독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일정한 보
호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은 전적으로 옳다. 종교라는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지
않은 비신자들 역시 법적 평등권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신성모독을 이유로
벌어지는 소송에서는 신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문제이다. 스페인의 시인 페르
난도 아라발(Fernando Arrabal)은 얼마 전 석방되었는데, 그건 순전히 전 세계에
서 그의 기소에 대해 항의하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는 반프랑코
주의자인 아라발에 대해 정치적 태도를 문제 삼아 그의 작품 활동을 금지하는 대
신, 신성모독을 구실로 그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만일 그를 정치범으로 취급할 경우 ‘비민주적’이라는 외부의 비
판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프랑코 정권은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
다. 하지만 이른바 비신자들은 당연히 다음과 같이 논증을 할 수 있다: “신성모독
을 범한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신’이라는 개념을 너무나도 비겁
하고 파렴치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의회에서는 근소한 표차로 ‘신을
살해한 자’라는 단어를 제례의식에서 사용하지 않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 단어에
담겨져 있는 반유대인 정서를 접어두자면, 길거리에서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을 제
대로 이해할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누구나 ‘신을 살해한 자’가 무슨 뜻이냐고
되물을 것이다.
이성적인 문학자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
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문학자가 그런 환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문
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은 언제나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귀를 쫑
6페이지
280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긋 세운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이 점에서 문학은 무언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한 바로
미터인 셈이다. 입법과 사회적 행태와 관련하여 문학은 무엇보다 사회적 제도들이
시대착오적인 것과 잘못된 금기를 존중함으로써 어떻게 제도의 명성을 계속 유지
하려고 노력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시대착오적인 것에 휩
싸여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어 감정을 상당히 자
극하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이 단어가 농경사회나 생물학적 맥락에
서 갖는 의미는 오늘날의 도시생활과 산업사회의 조건에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다는 점을 깨닫는 데에는 결코 냉철한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깊고 깊은 우
물’이나 ‘성문 앞 보리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여가산업에서
나 통용되는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늘
지탄을 받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흥분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을 허
무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기까지 한다. 스탈린은 “엄마 러시아”를 수호할 것을 호
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했다. 센티멘털하고 생물학적 본능에 호소하는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선거에 출마한 정치가들은 모두 ‘고향’이라는
단어를 구사하여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표를 끌어 모은다. 어떤 단체의 정관에는
“고향에 대한 권리”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는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단
어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경제적 및 정치적 이성의 둑을
한 순간에 무너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러한 위험을 경고하는
문학에 대해 우리는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법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권리라고 선
언하는 일이 너무 많다. 최근에 나는 어느 대중 주간지에서 상당히 매혹적인 사진
이 함께 실려 있는 기사 하나를 보았는데, 기사의 제목은 “행복과 부드러움에 대한
여성의 권리”였다. 아마 잡지는 이런 식의 제목으로 판매부수를 늘릴 수 있을 것이
다. 행복과 부드러움 – 어느 누가 이런 좋은 일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그에 대한
권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만일 그것이 권리라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권리로부터 의무가 도출되는 상황이 돼버린다. 남자인 나는 미력하나마 기꺼이 한
여성의 행복과 부드러움을 위해 노력할 용의가 있지만, 이를 의무로 받아들일 생
각은 결코 없다. 더욱이 이른바 남녀평등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
가? 설령 남성이 행복과 부드러움을 중시하지도 않고, 여성 또한 그런 문제에 신경
을 쓰지 않는데도, 권리라는 미명 하에 갑자기 이 여성이 무슨 가련한 대상으로
7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81
전락하여, 이제는 행복과 부드러움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마도
문학은 이러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제기할 것이다.
미국의 이혼소송에서는 ‘정신적 잔혹함’(mental cruelty)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잔혹함이 현실로 존재하고, 어쩌면
법관이 상상하거나 법률이 규정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끔찍한 정도의 잔혹함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일일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은 정신적 잔혹함이 수없
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혼소송에서 사용될 때의 이 개념은 오로지 가능한 한
더 많은 액수의 부양청구권을 관철하기 위한 논거에 불과하다. 특히 부인이 아주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언제나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인상을 풍
기고, 여기에 아주 미끈한 다리의 소유자이기까지 하다면 아주 설득력 있는 논거
로 작용한다. 어떤 남자가 정신적 잔혹함을 이유로 여자를 고소한 경우가 있는지
는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남자란 너무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이 여자로부터 정신
적으로 잔혹하게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물
론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정신적’이라는 형용
사 역시 막연하기 그지없는 개념이다. 작가들은 그러한 개념을 최대한 피하려고
할 것이다. ‘정신적 잔혹함’과 관련된 실제 사건에서는 우리가 흔히 ‘정신’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이기 보다는, 성적 욕구나 경제적 희망을 에둘러 말한 것에 불과하
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권력을 둘러싼 일이다.
이런 예들은 어찌 보면 웃기고 진부한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법
률, 법, 제도라는 표면 아래에서 그리고 추상적인 남녀평등원칙의 저변에서 무서
울 정도로 잔인하게 수행되는 권력투쟁의 일단을 드러내는 현상에 속한다. 법률은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억제하고, 행사된 폭력을 처벌할 수는 있지만, 지배권을 둘
러싼 투쟁에서는 정의라는 개념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거나 정의라는 이름으
로 오히려 약자를 더 두들겨 패기도 한다. 법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법적으로 규
범화할 수 있는 범죄는 작가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에 반해 범죄나
입법의 전제로서 작용하는 물밑 현상들은 오래 전부터 문학의 한 영역을 차지해왔
다. 즉, 사후적으로 또는 아주 뒤늦게야 범죄로 불리게 되는 현상들을 문학은 늘
깨어 있는 눈으로 관찰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를 20년
이 지난 후에야 범죄로 처단한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물론 어떤 측면
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세상의 그 어떤 법원도 해결할 수 없는
8페이지
282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물음을 제기한다. 즉, 법률과 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러한 완벽한 비
인간성과 몰인간성이 성립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불법이 법률의 성격을 취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를 다룰 때에는 늘 물밑에서 행해지는 권력투쟁과 마주치게 된다. 아이
스킬로스(Aischylos)는 아마도 「에우메니데스(Eumeniden)」에서 오레스트를
모친살해라는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직접 법을 제정하고자 했는지 모
른다. 이를 통해 가장 중대한 금기 가운데 하나를 파괴했지만, 동시에 시대의 경향
에 부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스킬로스 자신이 추방을 당했
거나 독살형에 처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레스트의 소송에서 모계중심주의자인
사악한 복수의 여신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들을 ‘경모의 여신’이라 부를 것이며
아테네에 이들을 숭배하는 문화를 정착시킬 것이라고 약속함으로써 여신들의 권
력상실을 무마했다. 이는 전형적인 부계중심주의의 제스처이다. 과연 그런 외양적
인 찬양만으로 모계중심의 신성이 실제로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정착하기 이전의 수천 년에 걸친 문화 속에서는 새로운 부계중심주의
질서가 기존의 모계중심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경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예
를 들어 구약성경에서 유일신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과도할 정도로 가혹한 율법
을 내세운 경우를 보자. 그러한 율법은 결코 완벽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갈수록 더
가혹한 형벌을 부과했음에도 자연신앙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미모의 여성이나 여왕이 법을 대변하는 냉엄한 선지자를 조롱하게 되면, 다
른 여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된다. 문학 역시 그러한 여인을 칭송하며, 나 또한
칭송한다.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여인들은 개의 먹이가 되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고
율법에 충실하기 그지없었던, 구약의 편찬자들은 그런 일화가 자신들에게 주는 기
쁨에 도취했던 나머지 라헬(Rahel)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제
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영민한 여인은 아버지의 집을 보호하는 신들을 훔쳐 자
기 남편의 여행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라고 다짐하면
서, 남편의 새로운 신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게 없지 않느냐고 자문한다. 아주 정확
하게 표현하자면, 남편의 새로운 유일신은 라헬에게는 너무나도 추상적이었던 것
이다.
별다른 신학적인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이 작가라면 처절한 투쟁을 겪은 이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결국 마리아가 성모로서 교리에 수용되었고, 그것도 하필이
9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83
면 가장 오래 된 모계신 가운데 하나가 자리했던 에페소스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이로써 새로운 세대의 의지와 열망이 관철되었고, 남성중
심의 추상적 질서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학은 언제나 이러한 의지의
편에 서있으며, 교조적인 것에 반대한다.
다시 아이스킬로스로 돌아가서 얘기를 해보자. 「에우메니데스」에 서술되어
있는 판결이유는 배우자살해가 모친살해보다 더 중대한 범죄라는 것이다. 문학에
서 이 판결은 그 이후 수천 년에 걸쳐 늘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오레스트의 어머니인 클리템네스트를 변호하기 위해 그녀는 단지 남편이 전쟁을
위해 자신과 아이들의 행복을 무참히 희생시켰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수를 했을 뿐
이라는 지적을 하곤 했다. 이런 식의 논거는 특히 우리들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성의 가치를 얼마나 많은 군인들을 국가를 위해 출산
했는가에 따라 평가하던 험악한 시대를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1900년경에 스트린트베리(Strindberg)는 물밑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권력투쟁
을 〈아버지(Der Vater)〉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놓았다. 결혼을 한지 최소한
25년이 넘은 한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그 사이 장성한 아들이 사실은 남편의 아이
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이며, 심지어 남편 친구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다. 이 여인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연극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실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법원의 재
판대상이 될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 자체를 제기하는 것은 옳다. 극
중의 이 여인은 별로 동감을 구하지는 못하지만, 아주 훌륭한 역할이며, 우리가 아
무런 동정심도 가질 수 없는 유약한 남편의 역할에 비해 훨씬 더 대단한 역할이다.
이 여인의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의심의 여지없이 혼인관계가 일방적인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지배당하는 현실에 복수하려는 것이다. 늙은 남편을 끝장내 버리기
위해 이 여인은 남편으로 하여금 아들의 친자 여부와 친구와의 우정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는 상당히 저열한 짓이긴 하지만, 물밑에서 행해지는 투쟁이란 늘 저열
하기 마련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연극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유감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젊었을 때 내가 스
트린트베리를 나의 모범으로 존경했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아버지는 이 처참한 상
황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어야 옳았다. “여보, 뭐 그런 일로 흥분할 필요가 있겠소.
뭐가 어떻게 됐든 그 애는 내 아들이요”.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10페이지
284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관계를 정신적인 관계로 승화시켰을 것이며, 남편은 부인에게 승리했을 것이다.
나중에 에른스트 바를라흐(Ernst Barlach)는 그의 작품 『죽은 날(Der tote Ta
g)』에서 똑같은 문제를 뚜렷하게 이런 식으로 해결했었다. 이에 반해 스트린트베
리는 편집증환자였다. 그는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여성운동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나머지 이 문제에 대한 단순한 대답을 표출해내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극중의
이 기괴한 여인은 극중의 아버지와 스트린트베리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다. 핏줄의
신화에 사로잡힌 봉건적인 친자원칙은 1900년경에 이미 그 타당성을 상실한지 오
래였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인과성의 논리와 목적성의 논리 사이의 영원한 투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여기서 목적성의 논리를 우리는 대강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즉, 나에게 유리한 법조문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내게 유리한 기회가 오면 경찰의
도움을 목청껏 외친다. 하지만 인과성의 논리를 통해 힘겹게 확립된 법률적 장치
들이 나의 욕망에 반한다면, 법률은 추상적인 현학에 불과하다고 욕을 퍼부으면서
법규정을 우회하려고 시도한다.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이런 식의 목적성의 논리
에 따라 행위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목적성의 논리는 제정법을
상대화하는 상당히 짜증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문학과 작가들은 목적성의
논리의 편에 서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건 문학과 작가들이 법률을 거부하기 때
문이 아니라, 문학과 작가들이 본능적으로 여하한 형태의 추상화도 거부하고 생생
한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법(司法)은 목적성의 논리에 대항할만
한 뾰족한 대책이나 힘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서도 여성을 처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 자신 사형반대론자라는 사실에 유의하기를 빈다. 그 이유는 결코 어떤 센티멘
털리즘이나 범죄자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범죄라는 비인간성을
법률적인 인간성으로 제거하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를 침해하는 일
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아무튼 사형은 결코 범죄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
다. 하지만 일단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부(情夫)와의 달콤한 삶을 실현
하기 위해 또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을 독살한 여인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남녀평등은 어디로 갔는가? 아마도 여성은 애당초
완전한 의미의 책임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탓인 것 같다. 이는 분명 여성을 폄하
하는 남성들의 관점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입장을 견지한다면 기껏해야 책임귀속
11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85
의 종류가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데도, 아예 책임능력 자체가 부족하다
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범죄소설을 보면 살인자들 가운데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다. 물론 실제 현실
에서의 통계는 정반대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즉,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살인은
모두 아주 원시적이어서 격정이나 물욕에 기인한다. 이에 반해 여성에 의해 자행
된 살인의 경우는 늘 법적으로 모두 해결되지 않는 어떤 부분이 남아있기 마련이
다. 이 나머지 부분이야말로 옛날부터 문학의 테마가 되어 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연적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 대한 복수로 아이들까지 죽여 버린
메디아(Medea)를 생각해 보라. 심지어 생물학적 논리 – 생물학도 논리로 이해하
고 이를 표방한다는 전제 하에 – 마저도 권력투쟁을 위해 파괴되고 만다.
얼마 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어떤 부인이 그녀의 양자인 소녀를 학대하여, 어린
아이가 거의 아사 직전의 겁 많은 동물과 같은 상태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법원
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별개로 이 여인은 더 이상 자기가 살던 동네
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동네의 다른 부인들이 그녀의 창에 돌을 던지고 거의 린
치에 가까운 일을 자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는 설명만으로는 동네 부인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동네 부인들이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추측으로는 부인들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경계를 본능적으
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계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지배욕에
굴복하게 되면 언제라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경계이다. 법률을 통해서
는 결코 확정할 수 없는 이러한 경계에 대해 문학은 그 어느 분과보다도 더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1945년에서 1948년까지 거의 무법상태의 상황을 체험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모든 제도들이 완전히 붕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령당국의
규율 역시 별다른 힘을 갖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암거래를 했으며, 우리 모두가
훔친 물건임을 뻔히 알면서도 구입을 하는 장물죄를 범했으며, 땔감을 훔치곤 했
다. 내게 변호인의 기질이 있다면, 나는 부인과 자식을 굶주리고 헐벗게 만드느니
차라리 범죄를 저지르는 게 나았다고 당당히 말하겠다. 아무튼 이 모든 일은 사면
이 되었고, 단 하나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당시에도 넘어서는 안 될 경계는 있
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상당히 유동적인 경계였고, 각 개인의 출신성분, 교육정도,
성격에 따라 경계가 다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선가는 “안 돼!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경계가 언제나 존재했다. 나는 그러한 경계를 인
12페이지
286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간적인 경계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처럼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 적어도 우리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한, 무엇을 해서는 안 될 것인지를
항상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의 사건은 우연히도 법원이 개입하는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법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수없이 유사한 사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나는 어머니의 탯줄에서 결코 떨어지지 못한 채, 고통과 부자유 속에서 삶을 영위
하는 수많은 마마보이들을 생각한다. 이들을 유약한 겁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언사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강자이며, 더욱이 어머니는
강력한 금기의 보호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어머니들은 비록 자신들은 의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지배욕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그렇지만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행
동을 어머니의 자애라고 포장하기 때문에, 결코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머
니의 사랑이라는 논거에 대항하여 모든 동물의 어미들은 언젠가는 새끼들을 내팽
개치고, 그래서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서 살고 나는 조용히 내버려 두라’는 식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라는 생물학적 반론을 펼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
도 없다. 인간의 어머니는 동물의 어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특권을 갈구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대한 결과를 낳는 위조를 했음에도 법률적 의미에서는 범죄가 되지 않는 경우
가 있다. ‘현학(Pedanterie; 아주 지엽적인 것들까지 지나치게 꼼꼼하게 따지는
태도)’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행위는 남자들이 자행하는 그러한 위조행
위에 해당한다. 현학이란 늘 정립된 질서와 제도가 지나치게 절대적 가치를 부여
받게 되어, 그 연원이 되었던 인간적인 결정과 나름의 진실로부터 멀어져 버린 경
우에 자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학은 문학에서는 옛날부터 희극의 소재가 되어
왔다. 즉, 자신이 규칙을 너무나도 정확히 준수했으며 그 대가로 연금수령자가 되
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마치 훌륭한 동시대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좀생원들에 대한
묘사는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결코 빨간불일 때 길을 건너지 않지
만, 언제나 정시에 관청에 출두하고 예배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며, 혼인상의 의무
를 법규정에 딱 맞추어 준수한다(곁가지이긴 하지만 ‘혼인상의 의무’라는 이 끔찍
한 표현을 통해 법률가들은 혼인관계를 보건위생이라는 비인간적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기막힌 희극은 가정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는
좀생원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부인이 남편의 좀생원 짓을 견디지 못하여 남편이
13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87
마시는 차에 독약을 집어넣는 일은 얼마든지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이런 좀생원
이 수백만으로 늘어나면, 대량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이들 좀생원들은 어떤 추상
적인 질서가 그들에게 이 질서와 민족의 성스러운 재산을 수호하라고 호소함으로
써 손쉽게 미쳐 날뛰는 야수가 되게 만들 수 있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른바 질서라는 것이 이들의 양심이 된다. 우리는 이들이 자
행한 끔찍한 일들을 직접 체험했으며, 여성들에게는 ‘자부심을 갖고 슬퍼하라!’는
문장으로 보상을 해줄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지적하면서 이에 대해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즉, 남자들이 제복을 입고 살인을 자행하거나 살인을 명령하면서 질서를 수호하는
일에 전념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성이 성가를 드높이는 시대는 결코 남성적인 시
대가 아니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컷의 시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훈육이라
는 구실로 번식능력이 있는 수컷들은 그저 잘 기능하는 개미집단의 도구로 행동하
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암컷은 제복을 입은 수컷에 본능적으로 끌리기 마련
이다. 이 점은 디스코텍의 플로어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은 순전히 생물학적 행태일 뿐, 남성적이거나 인간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우리의 현재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문학이 특
히 관심을 갖는 측면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아우슈비츠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묵인하고 있는 어떤 익명의 아우슈비츠가 행여 존
재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흔히 우리의 동일성과 주체성을 상실
해 간다는 얘기를 듣게 되지만, 이는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표현에 속한다. 실제로
도 그런 식의 표현으로는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쳐버릴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도
대체 우리가 부여잡고 싶어 하는 동일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막연하기 때문이
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회피한 채, 우리에게 정보와 광고만을 잔뜩 들이 밀어
놓고 그 속에 나타난 인위적인 형상을 우리의 동일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실정이다. 그건 단순히 악순환에 불과하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여전히 인간으
로 여기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제도적 장치를 위해 쓸모 있는 재료일 따름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분과의 학문들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별다른 마찰이 없이 유용
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인지에 골몰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상당수의 유명한 학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인간을 그저 동물과 비슷하게 여기고, 따라서 일종의 생
물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14페이지
288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동물학적 법칙에 비추어 정확하게 행동하고 그런 의미에서 건강하다고 부를 수 있
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정말 비인간적이며, 그 점에
서도 과거에 도덕이라고 불렀던 것들을 완전히 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예전에 『불가능한 증거조사(Unmögliche Beweisaufnahme)』라는, 상
당히 법적으로 들리는 제목을 단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자신이 쓴 책을 인용하는
것은 상당히 멋쩍은 일이지만, 이 책은 20년 전에 쓰였고 이 책이 그 사이 저자와
는 무관한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해가 되기를 바란다. 더욱이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이 책에 대해 쓴 글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저자
마저도 이를 통해 무엇을 잘못 썼는지를 대강 파악하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사
정도 감안해 주었으면 한다.
이 소설의 무대는 법정소송이지만, 사건이나 주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
한 점은 오로지 재판부와 피고인이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각자가 단
어에 부여하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여 양자는 늘 아주
섬세한 차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딴 말을 하게 되며, 이 점이
긴장감을 갖게 만든다. 법원은 하나의 제도로서 결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으며, 그 때문에 판사·검사· 변호사는 당연히 상당히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피고인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의 대상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불안정한 인간적 상황에 대해 그저 침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일 뿐이며, 어쩌면 그것이 제정된 법질서를 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묵
하고자 하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예컨대 검사가 피고인에게 “당신은 당신 부
인을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다”라고 비난하면, 피고인은 “무슨 말
입니까? 난 결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피고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당연히 그가 자신의 부인을 단순히 생물학적 객체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또는 판사가 피고인의 선서가 있기 전에, 과연 피고인이 선서를
할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선서를 할 생각인지를 질문하면, 피고인은 “판
사님께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신에게 선서를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피고인은
심지어 재판부 스스로 자신들의 권위를 뒤흔들어 버릴 생각이 없다면, 그 따위 질
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재판부는 다시 이 피고인의 경고를
재판부를 경멸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피고인이 제 정신이 아니어서 헛소리
를 내뱉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소송이 진행되면서, 재판기록은 서로
15페이지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 289
맞물리지 않는 언어의 파편들일 뿐이며, 어떠한 의문도 풀리지 않은 채로 남게 된
다.
내가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전혀 의식을 하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아마
도 문학과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서술을 한 것 같다. 또는 오늘날 ‘확립된 제
도’라고 부르는 것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서술을 한 셈이다. 물론 법과 법률에 대
한 우리 세대의 태도는 우리들이 생생하게 체험해야 했던 강제와 복종의 상징으로
서의 법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한 경험 때문에 우리는 법과 법률이 철저한
비인간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하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계속 나찌 시대를 언급하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사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분명 이제 더 이상 가스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일이 반복될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러한 만행을 어떤 인간적인 입법을 통해
방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성’이라는 개념이 신문기사
의 헤드라인이나 미사여구가 되어버리면, 이 개념 속에는 이미 ‘비인간성’의 싹이
내재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미사여구나 법률로 정착된 개념은 제도화를
거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관청이 신경 쓸 문제이지 각 개인이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인간성이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책임 있는 결정을 전제해야만 한다. 오늘
날 전 세계의 문학은 바로 이를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모든 제도화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적 태도 때문에 작가들을 좌파지식인이라고 모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언사는 문학을 상투적인 것으로 폄하하려는 술책일 따름
이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작가들을 그저 야당의 지지자로 단정하고, 단순한 ‘안티
(Anti)’에 불과한 존재로 규정하려고 한다. 어떤 체제든지 ‘안티’는 아주 쉽게 처리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요하다면 체제를 약간 변경하면 그만이고, 체제는 여전히
체제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체제를 단순히 필요한 보조장치로 여기
는 자유는 결코 허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점에서 전 세계 지식인들이 언어, 민족,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초월하여 한 목
소리를 내는 것을 볼 때 작가로서 놀라운 기쁨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커다란 희망
이 존재한다. 지식인들이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을 방지할 수 없었다는 사
16페이지
290 法學硏究 제21권 제3호(2010. 12)
접수일 (2010.11.22), 심사일(2010.12.10), 수정일(2010.12.15), 게재확정일(2010.12.17)
실에 커다란 좌절감을 느낀다는 흔한 주장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그건 최고의 ‘베
스트셀러’인 『성경』마저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 식의 주장이 담고 있는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국가, 정치,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참여는 국가, 정치, 사회가 압도적 권력을 행
사하면서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그 무엇이 되어 인간을 자원으로 소모하지 못하도
록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변증법적 존재가 아니라는 이러한 태도는
물론 비인간성을 단호하게 부정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정당성을 갖는다.
지식인은 일종의 빨치산의 존재양식이며,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이것만이 거대한
제도적 장치의 독선적 정의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이 위대한 교훈을 나는 1943년 함부르크의 어느 간이역에서 벌어진 한 장면을
통해 묘사하고자 한다. 어떤 여인이 멈춰 선 기차의 창가에 기대어 화염으로 덮인
도시로부터 피난을 가려고 몰려든 사람들을 가로막고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두 명
의 나찌 돌격대 요원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야 이 자식들아! 차라리 나를 감옥
에 쳐 넣어라! 비를 피할 지붕이라도 갖게!” 중무장을 한 국가권력의 대표자 두
명은 이 소리를 듣고 당황한 나머지 저만치 사라져 갔다.
문학은 바로 이 여인의 편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