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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 조건문의 형식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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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연구 제22권 제2호: 35~78 한국법철학회 2019

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 조건문의 형식을 중심으로 ―

1)

박준석**

<국문초록>

규범은 하나의 의미 그 자체로서 그것을 언어적으로 포착한 문장이나 진술과

는 구별된다. 이러한 규범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양하게 상호 결합된 세부적인

의미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사이의 결합이 조건문의 형식으로 표현

된다는 것으로부터, 그와 같은 의미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조건적 관계라는

것도 하나의 의미 그 자체일 수 있다.

규범을 형성하는 의미들 사이의 결합은 우리가 ‘조건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의미 있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언어적으로 구현한다

면 그것은 바로 조건문의 형식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규범의 질서 내지 체계로서 법의 본성을 탐구하는 법철학적 연구들은 규범이

이렇듯 조건문의 형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누누이 지적해 왔다.

DOI: 10.22286/kjlp.2019.22.2.002 * 이 논문은 2018년도 전북대학교 연구기반 조성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투고일자 2019년 7월 3일, 심사일자 2019년 7월 30일, 게재확정일자 2019년 7월 30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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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건문의 형식을 취하는 규범적 문장을 출발점으로 하여 법적 추론의

과정을 이어 감에 있어서 전통적인 추론 규칙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작동할 것

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이 글은 바로 이러

한 문제를 점검해 보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현대철학에서 가장 뜨거운 연구 주제 중의 하나로 꼽히는 ‘조건문’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에 관한 최신의 논의가 법학의 쟁점을 다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보는 고전적인 이해와 달리, 그것

을 확률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가능세계 의미론이라는 새로운 설명 체계를

구축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규범적 사고 실험 및 법적 추론을

둘러싼 일련의 문제들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Ⅰ. 들어가며

규범의 존재론적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크게 화용론적인(prag-

matic) 접근과 의미론적인(semantic) 접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1) 전자에

의하면 규범이 창설되는 것은 이른바 명령적 언어행위(speech acts)2)가 이루어

지는 문맥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후자에 의하면 그렇게

창설되는 규범이 하나의 특수한 명제적 지위(propositional status)3)를 갖는다는

1) 심헌섭, 뺷분석과 비판의 법철학뺸(법문사, 2001), 62-63면; 오세혁, “화용론적 규범 관과 의미론적 규범관―규범의 본질에 대한 언어철학적 연구―”, 뺷홍익법학뺸 제2 권, 홍익대 법학연구소, 2001, 7면 이하 참조. 알초우론(C.E. Alchourrón)과 불리긴 (E. Bulygin)의 용어법에 따라 규범의 본질에 대한 화용론적 접근과 의미론적 접근 은 각각 “표현적(expressive) 규범관”과 “질료적(hyletic) 규범관”으로 불리기도 한 다. 한편 불리긴은 화용론적(표현적) 접근의 명확한 예로 켈젠(H. Kelsen)의 후기 이론을, 의미론적(질료적) 접근의 전형적 예로 바인베르거(O. Weinberger)의 이론 을 들어 대비시키고 있다. E. Bulygin, “Norms and Logic―Kelsen and Weinberger on the Ontology of Norms”, Law and Philosophy 4, 1985, p.146 참조. 2) 오스틴(J.L. Austin)은 진위적 발화(constative utterance)와는 구별되는 수행적 발 화(performative utterance)를 그 발화수반력(illocutionary forces)에 따라 분류하 면서 “명령하기”와 같은 것은 이른바 행사발화(exercitives)에 속한다고 말한다. J.L. Austin, 김영진 역, 뺷말과 행위뺸(서광사, 1992), 184-18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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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은

규범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해서 어떠한 접근 방식을 취하더라도 규범 그 자체

와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로 나타낸 것은 일단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

다.4) 규범은 말하자면 ‘의미(meaning)의 세계’에 속하는 어떤 것이고, 의미 그

자체는 그것을 언어적으로 포착한 문장(sentences)이나 진술(statements)과는

구별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5)

이렇게 규범과 그것을 언어로써 구체화한 문장 내지 진술이 서로 구별되어

야 한다면, 규범이 대체로 어떤 종류의 문장이나 진술로 표현되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6)은 어쩌면 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는 거리가 먼 일로 여겨질 수 있

3) 명제란 “문장의 의미”에 해당하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Benson Mates, 김영정·선우환 역, 뺷기호논리학뺸(문예출판사, 1996), 32-33면 참조. 4) 심헌섭, 앞의 책(2001), 308면; 오세혁, 앞의 글(2001), 22-23면 참조. 5) 혹시 이 같은 기술이 일견 중립적이지 않고 의미론적(질료적) 접근에 치우친 것이 라 비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불리긴의 표현에 의하면, 질료적 규 범관에 의할 때 규범은 그것을 포착한 문장의 의미이지만, 표현적 규범관은 규범을 언어적 표현의 의미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발화수반력의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시 도로서, 규범을 특별한 종류의 문장의 의미, 즉 규정적 의미(prescriptive meaning) 가 아닌, 발화자에 의해 수행되는 특정 유형의 행위, 즉 규정 행위(prescribing action)의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E. Bulygin, 앞의 글, p.146 참조. 그렇지만 이러 한 대비는 규범의 생성이라는 단계를 지나면 그 뚜렷함을 상당 부분 잃게 될 것이 다. 일단 생성된 규범은 이른바 규범체계의 구성요소가 되어 다른 규범들과 의미의 측면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기술은 의미론적 접근의 경우뿐만 아니라 화용론적인 접근의 경우에도 의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화용론적(표현적) 접근의 예로 소개되고 있는 켈젠의 후기 이론이 굳이 규범을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의미”라고 했던 점도 이해할 수 있다. H. Kelsen, Michael Hartney (trans.), General Theory of Norms (Clarendon Press, 1991), p.6 및 p.11 등 참조. 심헌섭, 앞의 책(2001), 62면 및 오세혁, 앞의 글(2001), 11면 및 21-23면의 입장도 본문과 비슷하며, 또한 명제와 언어행위의 관계에 대한 설(John R. Searle)의 종합적인 설명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 침해 준다. “명제는 주장 또는 진술과 예리하게 구별된다. 진술이나 주장은 행위이 지만, 명제는 행위가 아니다. 명제는 주장의 행위 속에서 주장되고, 진술의 행위 속 에서 진술되는 것이다.” John R. Searle, 이건원 역, 뺷언화행위뺸(한신문화사, 1987), 31면 참조. 6) 이는 법의 “형식(forma)”에 대한 슈타믈러(R. Stammler)나 델 베키오(Giorgio Del Vecchio)의 신칸트주의적인 물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이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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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듯하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하고 일단 그 물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와 같이, 규범은 당위문

(ought-sentences)7)으로 포착될 뿐 아니라 또한 조건문(conditionals)8)의 형식을

좇아 기술될 것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잠정적 문답과 관련하여 아

래에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확인하게 될 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내용으로 요

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규범에 관한 이론의 체계 정립을 위한 노력, 그중에서도

특히 규범논리(deontic logic)9)의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도의 역사를 돌이켜 보

하고 있는 물음 역시 일견 법의 형식적 특징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항 구적이고 보편적인 법의 표상 형식’이나 ‘사회경제적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논리적 으로 선취하는 형식으로서의 법’에 대한 탐구의 문맥과는 관련이 없다. R. Stammler, “Fundamental Tendencies in Modern Jurisprudence”, Michigan Law Review 21(6, 7), 1923, p.767; G. Del Vecchio, John Lisle (trans.), The Formal Bases of Law (The Macmillan Company, 1921), pp.68-69 참조. 7) H. Kelsen, M. Knight (trans.), Pure Theory of Law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p.87 참조. 당위문은 규범이 어떤 행위를 명령함으로써 의무적인 것 으로 만드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거나, 수권하는 경우를 나타내는 문장을 포괄한다. 이에 대해서는 같은 책, p.118 참조. 8) Jerzy Stelmarch & Bartosz Brożek, Methods of Legal Reasoning (Springer, 2006), pp.23-24 참조. 여기서 조건문의 형식으로 기술된 규범이란 칸트(I. Kant)가 말하는 가언명령(hypothetical imperatives)에 해당하는 규범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칸트 에 따르면 후자는 단지 다른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요구되는 규범을 뜻하 며, 이는 어떤 규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서 요구됨을 나타내는 정언명령 (categorical imperatives)과 대조를 이룬다. I.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in Mary J. Gregor (trans. & ed.), Immanuel Kant―Prac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67 참조. 하지만 본문에서 다루 고자 하는 조건문의 형식으로 기술된 규범이란 단지 통사론적으로(syntactically) ‘조 건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의미의 ‘조 건적(conditional)’ 규범·명령·판단 또한 종종 ‘가언적(hypothetical)’ 규범·명 령·판단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H. Kelsen, 앞의 책(1991), pp.13-21; K. Engisch, 안법영·윤재왕 역, 뺷법학방법론뺸 (세창출판사, 2011), 39-59면 참조. 9) 본문에서는 “SDL”을 “표준의무논리”로 번역하는 것과 같이 특정 체계를 명확히 지 시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deontic logic’을 굳이 ‘의무논리’로 번역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의무논리’라는 번역이 ‘deontic logic’의 개념 정의를 협의의 그것 으로 한정하는 입장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논리’라는 번역은 현재 ‘deontic logic’을 널리 “규범적 표현(normative expressions)의 논리와 관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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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규범이 당위문으로 포착될 것이라는 전망은 그야말로 전체 논의를 관통하

는 중심 의제를 설정해 왔지만, 규범이 조건문의 형식을 통해 기술될 것이라는

전망은 대체로 주변적인 언급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고 있다. 둘째, ‘의미의 세

계’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서 규범이 조건문의 형식으로 기술된다는 점은 곧 규

범을 구성하는 의미 요소들이 애초에, 우리가 ‘조건적’이라 부르기에 적합한,

모종의 특수한 연계 방식에 따라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이러한 두 가지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면, 앞서의 우려에 대하여도 우리

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규범이 대체로 어떤 종류의 문장이나 진

술로 표현되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규범을 구성하는

의미 요소들이 내적으로 결합되는 방식(‘의미 조직 방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따져 보는 것이며, 이러한 한도 내에서 그와 같은 물음은 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일부를 이룬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의 이른바 ‘조건적’ 의미

조직 방식에 대한 탐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위에

서 기술한 내용들을 실제로 확인해 보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먼저

규범논리의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그 대체적인 경향과 한계를 중

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Ⅱ), 이어서 B.C. 3세기 전후 메가라-스토아(Megara-

Stoa)학파의 사상가들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건문의 이해를 둘러싼 철

학적 논의의 흐름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Ⅲ, Ⅳ). 이를 통해서 규범을 구성하는

의미 요소들 사이의 결합을 이끄는 논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 최종적으로는 규

범의 본질에 대한 이와 같은 철학적 성찰이 법률의 해석·적용, 기타 타당한 법

적 추론의 기준에 관한 법학적 사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

기로 한다(Ⅴ).

기호논리학의 한 분과”로 정의하는 입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deontic logic’의 개 념 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Paul McNamara, “Deontic Logic”,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8/entries/logic-deontic/, p.67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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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규범과 당위문

앞에서 우리는 규범이 의미의 세계에 속하는 어떤 것이며, 의미 그 자체는

그것을 언어적으로 포착한 문장이나 진술과 구별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구별은 일반적으로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철학적 논

쟁10)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실 하나의 의미를 언어적으로 구현해 내는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1] Snow is white. / Der Schnee ist weiss.

[2] John loves Mary. / Mary is loved by John.11)

[1]은 동일한 의미를 다른 언어 체계의 문장들로 나타낸 예이고, [2]는 동일한

의미를 다른 구조의 문장들로 나타낸 예이다. 이렇게 다양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 그 자체를 ‘명제’라 하는데, 종래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이 문장인

지 아니면 명제인지를 두고 견해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12) 명제를 논리학

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것이 순수하게 의미 그 자체로

서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13) 나아가 의미가 일단 언어적

10) Alan Hausman et al., Logic and Philosophy―A Modern Introduction, 10th Edition (Thomson Wadsworth, 2007), p.300 참조. 11) Alan Hausman et al., 앞의 책, p.301의 예들을 인용. 12) 실제 논쟁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콰인(W.V.O. Quine)은 ‘진 술’을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으로 보는데, 그것은 ‘문장’ 중에서도 참 거짓의 속성을 가지는 것만을 가리킨다. W.V.O. Quine, Elementary Logic, Revised Edi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p.5-8 참조. 메이츠(Benson Mates)의 설명에 의하면 이 외에도 ‘사고(thought)’, ‘판단(judgment)’ 등을 논리학의 대상으로 제안 하는 견해들이 있다. Benson Mates, 앞의 책, 32면 참조. 13) 이러한 이유를 고려할 때, 규범의 존재론적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화용론적 접근 및 의미론적 접근은 윤리적 기준들이 이른바 규범적 차원을 갖는 이유에 대한 주의 주의적(voluntarist) 설명 및 실재론적(realist) 설명과 각각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Christine M. Korsgaard, 강현정·김양현 역, 뺷규범성의 원천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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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포착되지 않고서는, 그것에 대해 어떤 논리상의 검토를 한다는 것도 상상

하기 어려울 것이다.14)

마찬가지로 하나의 규범을 언어로 표현할 때도 다양한 형태의 문장을 활용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서술문(declarative sentences)15)으로 나타내거나 당위

문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16)

[3]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19조).

[4]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형법 제250

조 제1항).

[5]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민법 제2조

제1항).

[6] 피고는 원고에게 금 10,000원을 지급하라.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 규범은 당위문으로써 가장 잘 포착될 것이라는 전

망이 거의 당연시되어 왔다. 설령 어떤 법률 조항이 언어적·문법적으로는 서

학과 현실사, 2011), 42면 참조. 14) 주의해야 할 점은 명제를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논리학에 서 명제의 개념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명제의 개념이 없이는 논리학에서 문장의 의미를 해치지 않고 형식화한다거나, 다른 문장으로 대 치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문장들의 의미의 동일성 을 보장하는 기준으로서 명제의 개념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Alan Hausman et al., 앞의 책, p.301 참조. 15) 간혹 ‘존재문(is-sentences)’ 또는 ‘직설문(indicative sentences)’이라 부르는 경우 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 H. Kelsen, 앞의 책(1970), p.87; 심헌섭, 앞의 책 (2001), 299면 참조. 16) 이와 관련하여 심헌섭은 양자가 “동형관계(Isomophie)”에 있다고 말한다. 심헌섭, 뺷법철학 Ⅰ―법·도덕·힘―뺸(법문사, 1993), 262면; 심헌섭, 앞의 책(2001), 57면 및 302면 참조. 17) 오세혁, “법과 논리”, 뺷한림법학 FORUM뺸 제5권, 한림대 법학연구소, 1996, 247면 의 예들을 인용. 오세혁은 [3]을 서술문, [4]를 가언적 서술문, [5]를 의무문, [6]을 명 령문의 예로 들고 있는데, 결국 앞의 둘은 서술문, 뒤의 둘은 당위문의 형태를 취하 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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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규범 이론적·논리적으로는 여느 서술

문과 같이 취급될 수 없으며, 결국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당해 법률 조항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혹은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당위문의 형태

로 재구성한 뒤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규범(명령)문은 직설문의 변종에 불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수

한 표현범주이며, 실제적으로 다른 역할을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종종 규범

문은 직설문의 표현방법을 따른다. 모든 법률이 그러하다. 형법 제124조의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

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행 또는 가혹한 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도 문언에 따라서

보면 하나의 직설명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설문이 아니고 규범[문]이다. 이것이

논리적 의미에서 직설명제라면, 동조가 규정한 신분자가 동조를 위반했으나 처벌

이 없었다면 그것은 부정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경우 법률이 부정된다고 보

지는 않는 것이다.18)

이 같은 반응에 대해서는 앞에서 (화용론적 접근의 요소로) 언급한 ‘명령적 언

어행위’ 및 ‘발화수반력’의 개념을 생각하면 일견 수긍할 수 있을 듯싶다. 이들

은 “하나의 주장, 질문, 명령 또는 추측 사이의 차이란 사용되고 있는 문장의 의

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문장을 다르게 사용하는 데 있는 것”19)

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당위문의 형태를 취할 때에야 비로소 분

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규범의 본질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유사한 문맥에

서, 명령적 언어행위 및 발화수반력의 개념은 또한 “규범의 언어적 표현

(linguistic expression of norms)”과 이른바 “규범에 대한 진술(statements about

norms)”이 설령 똑같이 당위문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서로 구별되는20) 이유

18) 심헌섭, 앞의 책(2001), 299면. [ ] 안의 내용은 필자의 보충이며, 인용문에 딸린 각 주는 생략. 19) E. Bulygin, 앞의 글, p.148. 20) H. Kelsen, 앞의 책(1991), p.1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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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21)

규범논리의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도들 역시 당위문으로 나타낸 규범을 대

전제로 하는 실천적 추론의 구조를 해명하는 것을 진정한 도전으로 여겼다. 이

들의 역사는 대체로 14세기경에 시작된 규범적 개념들과 관련한 논리의 연구

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17세기 라이프니츠(G.W. Leibniz)의 이른바 ‘법

률양상(iuris modalia)’ 범주에 대한 논의를 거쳐, 본격적으로는 1951년에 폰 라

이트(G.H. von Wright)22)가 발표한 논문23)에서부터 그 이론적 기초가 정립되

었다고 말할 수 있다.24) 이러한 과정에서 줄곧 관찰되는 경향은, 어쩌면 당연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술문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해 온 논리학적 체계25)

를 적절한 변용을 거친 후 당위문에 대해 확장·적용시켜 보는 것이었다.26) 구

체적인 방법론으로는 첫째, 단순한 명제계산(propositional calculus)의 체계를

당위문의 분석에 도입·활용하는 것과 둘째, 양상논리(modal logic)의 기본 관

념들, 특히 진리양상(alethic modalities)을 유추한 이른바 규범양상(deontic

modalities)을 활용하는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각각의 접근법과 관련

하여 대표적인 시도를 꼽는다면, 전자의 예로는 말리(E. Mally)를, 후자의 예로

21) Uta Bindreiter, “The Modality of Kelsen’s Sollsatz”, Rechtstheorie 21, 2005, p.169 참조. 22) 종종 ‘(게오르그 헨리크) 폰 브리크트’로 발음·표기되지만, 여기서는 그 자신이 밝 힌 발음에 따라 표기했다. 그는 핀란드 출신의 철학자이지만, 자신의 성이 과거 독 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인의 그것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폰 라이트’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 바 있다. 23) G.H. von Wright, “Deontic Logic”, Mind N/S 60(237), 1951, pp.1-15. 24) Risto Hilpinen, “Deontic, Epistemic, and Temporal Modal Logics”, in Dale Jacquette (ed.), A Companion to Philosophical Logic (Blackwell Publishers, 2002), p.500 참조. 25) 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몇 시인가요?’, ‘문 닫으시오’, ‘오,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등 참도 거짓도 아닌 문장들은 진술이 아니다. 오직 서술문만이 진술이 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면 모든 서술문이 곧 진술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도 드러난다.” W.V.O. Quine, 앞의 책, p.5. 26) 벤담(J. Bentha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해의 논리학”이라 부르면서, 그것이 다룬 적이 없는 이른바 “의지의 논리학” 또는 “명령의 논리학”에 대해 선구 적인 탐구를 진행한 바 있다. H.L.A. Hart, Essays on Bentham―Studies in Jurisprudence and Political Theory (Clarendon Press, 1982), p.1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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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초기의 폰 라이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27)

한편 기존의 논리학적 체계에 대한 “적절한 변용”이라는 주제는 동시에 규

범논리의 기초(토대)에 관한 중대한 철학적 쟁점으로 이어지게 된다.28) 여기서

이 글의 목표와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 같은 논의의 흐름이 다름 아닌

‘규범을 당위문으로 포착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

존의 논리학적 체계가 어디까지나 서술문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해 온 것인 만

큼 이를 당위문에 그대로 적용하기 곤란하다는 인식은 주지하듯이 ‘예르겐센

(Jörgensen)의 딜레마’29)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귀결되었다. 당위문으로 된

대전제와 서술문으로 된 소전제를 통해서 다시금 당위문으로 된 결론을 이끌

어 내는 이른바 ‘법률적 삼단논법(legal syllogism)’은 과연 문장들 사이의 이질

성에도 불구하고 추론의 타당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섣불리 이를

수용하려다가 기존의 논리학적 체계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를 불러

오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규범논리와

관련한 철학적 논의의 방향도 크게 달라져 왔다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간략히 요약해 본다면, 그것은 대체로 다음 네 가지 중의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당위문과 같이 참도 거짓도 아닌 문장이 개입하

는 추론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이들 사이에는 추론적 관계가 존재하

27) Paul McNamara, 앞의 글, pp.3-4 참조. 28) 연구 수행의 단위로서 규범논리의 체계에 관한 ‘이론적 문제’와 규범논리의 기초 (토대)에 관한 ‘메타-이론적 문제’를 일견 구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가령 앞에서 언급한 폰 라이트의 논문은 종래의 논리학적 체계에 규범양상을 추가함으로써 조 정할 필요가 생기는 체계내적 사항을 정비하는 데 주력하면서, 체계 자체를 보장하 는 기초(토대)에 관한 반성적 논의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약간의 예외적인 언급 에 대해서는 G.H. von Wright, 앞의 글, p.15 참조. 하지만 바인베르거가 불만을 나 타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자의 문제를 마냥 방치한 채 시종일관 전자의 문 제만을 다루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태도이다. O. Weinberger, “Freedom, Range for Action, and the Ontology of Norms”, Synthese 65, 1985, p.307 참조. 29) J. Jörgensen, “Imperatives and Logic”, Erkenntnis 7, 1937/1938, pp.288-296. 이 는 최악의 경우 규범논리라는 것 자체가 도대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예르겐센의 딜레마’를 둘러싼 상세한 논의로는 심헌섭, 앞의 책(2001), 291-292면; 오세혁, 앞의 글(1996), 239-241면; Paul McNamara, 앞의 글, pp.29-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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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45

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M. Moritz, K. Englis, H. Kelsen), 둘째, 이와 동일한 전제

에서 출발하되, 다만 당위문을 서술문의 형태로 바꿔서 하는 간접적·우회적

추론을 인정하자는 견해(W. Dubislav, J. Jörgensen, H.G. Bohnert), 셋째, 당위문

에 대해서는 참 또는 거짓의 가치(진리치, truth-value)와는 다른 종류의 가치를

고안하여 부여함으로써, 여전히 그들 사이에 명제계산과 유사한 것이 가능해

지도록 만들자는 견해(O. Weinberger), 넷째, 당위문에 대해서도 진리치를 인

정하자는 견해(G. Kalinowski, U. Klug).30)

Ⅲ. 규범과 조건문

규범을 언어로 표현한 문장이 조건문의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 인식은 유독 법

규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많이 표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찍이 벤담은

일반적으로 접하는 단적인 명령들(unqualified commands)과 달리 법이 특정 행위

를 요구하거나 허용할 때는 통상 “조건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

다.31) 슈타믈러는 법규를 이른바 “가언적 판단”이라 규정하였으며,32) 켈젠에 의

하면 특정 행위가 명령되었다는 것은 곧 “그 반대의 행위가 제재의 조건이라는

것”33)을 의미하므로, 법규는 기본적으로 “특정 조건하에서 특정 결과가 발생해

야 한다.”34)는 형태로 정식화되는 것이었다. 또한 라드브루흐(G. Radbruch)가

30) 각각의 견해에 대한 상세한 소개에 대해서는 심헌섭, 앞의 책(2001), 292-307면; 오 세혁, 앞의 글(1996), 240-246면 참조. 다만, 오세혁은 ① 당위문이 개입하는 경우 추 론적 관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 ② 당위문에 진리치 내지 그에 상응하는 논리적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가치 개념을 창출하자는 입장, ③ 진리관계에 한정되지 않 도록 추론 개념 자체를 넓히자는 입장 등으로 선택지를 분류·제시하고 있지만, 사 실 ②에서 진리치가 아닌 별도의 논리적 가치를 창출·부여하자는 입장이 (그 주장 자인 바인베르거도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결국 ③의 입장이기 때문에 이러한 분 류는 다소 부정확한 면이 있다. O. Weinberger, 앞의 글(1985), pp.307-308 참조. 31) H.L.A. Hart, 앞의 책(1982), pp.117-118 참조. 32) R. Stammler, Theorie der Rechtswissenschaft (Halle, 1911), S.311. 심헌섭, 앞의 책(2001), 281면에서 재인용. 33) H. Kelsen, 앞의 책(1970), p.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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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법철학연구

법개념의 선험적인 구성부분이라고 지적했던 구성요건(Tatbestand)과 법률효과

(Rechtsfolge)에 대하여,35) 엥기쉬(K. Engisch)는 그것들이 각각 논리학자들이 말

하는 조건문의 전건(antecedent)과 후건(consequent)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6)

물론 법규범이라고 해서 모두 조건문의 형식을 좇아 기술되어 있는 것은 아

니다. 구성요건(법률요건)과 법률효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경우와 달리, 단적

이고 무조건적인 형태로 되어 있는 법규범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법체계의 근

본적인 확신을 담고 있는 것이거나, 정의 조항 또는 목적 조항과 같이 굳이 ‘요

건-효과’의 틀로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 등은 통상 조건문의 형태를 취하지 않

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반대로 오로지 법규범의 경우만 조건문의 형식을

좇아 기술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켈젠은 “실정 사회 질서의 모든 일반 규범

은 … 어떤 행위를 오직 특정 조건하에서만 지시할 수 있다. … 모든 규범은 단

지 조건적으로만 유효하다.”37)고 선언했으며, 이보다 앞서 라이프니츠는 (법

률행위의 부관으로서) “조건(conditions)”에 대한 일반 이론을 정립하는 데 논리

학에서 다루는 조건문의 특수한 형태로서 이른바 “도덕적 조건문(moral

conditionals)”의 분석을 활용하기도 했었다.38)

요컨대 켈젠이 지적한 것처럼 조건문이란 다양한 종류의 규범들을 정확히

정식화하는 데 필요한 언어적 형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사실이다.39) 그리고 많

은 경우 법규범의 명료한 정식화를 위해 조건문의 형식이 활용되고 있다. 또한

실제 어떤 법률 조항이 언어적·문법적으로는 단적이고 무조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규범 이론적·논리적으로 보다 명료한 재구성이 필요

할 경우에는 당해 법률 조항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건문의 형태로 재

구성한 뒤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34) H. Kelsen, 앞의 책(1970), pp.76-77 참조. 35) G. Radbruch, 최종고 역, 뺷법철학뺸(삼영사, 2011), 68-69면 참조. 36) K. Engisch, 앞의 책, 45면 참조. 엥기쉬는 델 베키오를 인용하면서, 모든 법명제를 “조건적 당위명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같은 책, 25면 및 44-45면 등 참조. 37) H. Kelsen, 앞의 책(1991), pp.20-21. 38) Alexandre Thiercelin, “Epistemic and Practical Aspects of Conditionals in Leibniz’s Legal Theory of Conditions”, in Dov M. Gabbay et al. (ed.), Approaches to Legal Rationality (Springer, 2010), p.205. 39) H. Kelsen, 앞의 책(1991),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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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47

[7] 네 개인적 행위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추구할 수 있게끔 행하

라.40)

[8] 남이 네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너 또한 그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41)

[9] 누구나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42)

[10] 의회에서 여왕이 제정한 것은 법이다.43)

[11] 아무도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된다.44)

[12] 유체물이란 토지, 노예, 의복, 금, 은 기타 수많은 물건들처럼 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을 말한다(「법학제요」, 2.1).45)

[7′] 만일 네 개인적 행위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추구할 만하다면,

너는 그 행위준칙에 따라 행할 수 있다.

[8′] 만일 네가 어떤 것을 남으로부터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면, 너 또한 그것을

남에게 시행해서는 안 된다.46)

[9′] 만일 누군가 약속을 했다면, 그는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47)

[10′] 만일 어떤 규칙이 의회에서 여왕이 제정한 것이라면, 그 규칙은 법이다.

[11′] 만일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으로부터 어떤 이득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취할 수 없다.

[12′] 만일 어떤 물건이 토지, 노예, 의복, 금, 은 기타 수많은 것들 중 하나라면,

그것은 유체물이다.48)

40) I. Kant, 앞의 책, p.73 참조. 41) 심헌섭, “황금률과 법”, 뺷법학연구뺸 제2권, 연세대 법학연구원, 1982, 94면 참조. 42) S. Pufendorf, edited by James Tully, On the Duty of Man and Citizen according to Natural Law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69 참조. 43) H.L.A. Hart, 오병선 역, 뺷법의 개념뺸(아카넷, 2002), 141면 참조. 44) R. Dworkin, 장영민 역, 뺷법의 제국뺸(아카넷, 2004), 39면 참조. 45) G. Sartor, edited by Enrico Pattaro, A Treatise of Legal Philosophy and General Jurisprudence Volume 5: Legal Reasoning―A Cognitive Approach to the Law (Springer, 2005), p.523 참조. 46) 심헌섭, 앞의 글(1982), 95면 참조. 47) H. Kelsen, 앞의 책(1991), p.21 참조. 48) G. Sartor, 앞의 책, p.5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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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법철학연구

이처럼 언뜻 조건부로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칸

트의 “정언명령”([7]), 그것과 유사한 윤리적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헤어(R.M.

Hare) 등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는 ‘근본공식’49)인 “황금률”([8]), 자신이 처한 상

황에 따라 그때그때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이행할 것이 요구되는 보편타

당한 “자연법상의 의무”로서 ‘약속 준수 의무’([9]), 법체계를 구성하는 여타의

규칙들에 대해 그 효력 판정의 기준을 제공하는 이른바 ‘궁극적 규칙’으로서 하

트(H.L.A. Hart)가 말하는 “승인률”([10]), ‘규칙의 체계로서의 법’이라는 실증주

의적 관점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법체계의 밑바탕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법

의 구성요소로 드워킨(R. Dworkin)이 강조하는 “원리” 규범([11]), 보통의 경우

매우 직접적·단정적인 형태의 문장으로써 특정 개념의 의미를 규정하는 법

률상의 “정의 조항”([12]) 등은 모두 조건문의 형식을 좇아 다시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규범을 조건문으로 포착하는 과정’이 규범논리의 체계를 수

립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합당한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고 있다. 이는 종래 규범논리의 체계로서 제안되었던 것들이 그

체계의 정합성을 의심케 하는 일련의 역설50)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그에 대하

여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역설을 초래하

게 되는 원인이 주로 ‘조건문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밝혀

지고 있음51)에도 그러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

49) 심헌섭, 앞의 글(1982), 94-95면 및 102면; 김종국, “보편주의 윤리학에서 황금률 논쟁―칸트와 헤어―”, 뺷철학연구뺸 제62권, 철학연구회, 2003, 75면 이하 참조. 50) 자주 거론되는 규범논리적 역설로는 로스(A. Ross)의 역설, 프라이어(A.N. Prior) 의 역설로도 불리는 파생적 의무(derived obligation)의 역설, 착한 사마리아인의 역설, 치좀(R.M. Chisholm)의 역설로도 불리는 반의무적 명령(contrary-to duty imperatives)의 역설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의무의 충돌 상황을 다루는 사르트르 (J.P. Sartre)의 딜레마 및 플라톤(Plato)의 딜레마, 포레스터(J.W. Forrester)의 역 설로도 불리는 공손한 살인자(gentle murderer)의 역설, 이른바 ‘법으로부터 자유 로운 영역’에 관한 논의와 연결되어 있는 규범적 흠결(normative gaps)의 수수께끼 등 다수의 규범논리적 역설들이 논의되고 있다. 각각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Paul McNamara, 앞의 글, pp.29-53 및 pp.80-102; 오세혁, 앞의 글(1996), 256-260면, G. Sartor, 앞의 책, pp.475-478; 심헌섭, 앞의 책(2001), 491면 이하 참조. 51) Risto Hilpinen, 앞의 글, p.502; Paul McNamara, 앞의 글, p.38 및 pp.86-94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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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49

다. 더욱이 주지하는 것처럼 ‘법률적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당위문일 뿐 아니

라 조건문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전자의 형식과 관련해서는 규범

논리의 기초(토대)에 관한 중대한 철학적 논의가 수행되고 있는 반면, 후자의

형식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다수의 역설의 중심에 놓여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상

황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는 논리학의 발전사라는 배경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

와 같이 규범논리의 체계는 서술문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해 온 논리학적 체계

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가 논리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완전히 무로부터(ex nihilo) 창조했다”52)는 평가

를 받고 있는 만큼, 전통적인 논리학적 체계의 근간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적 삼단논법(categorical syllogism)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언적 삼

단논법에는 조건문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논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훗날 조

건문이 사용되는 이른바 가언적 삼단논법(hypothetical syllogism)을 포함하게

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자신들은 조건문에 관해 거의 연구한 바가 없

p.111 n.42; 오세혁, 앞의 글(1996), 256-257면; G. Sartor, 앞의 책, pp.418-419 및 p.478 참조. 학설들의 문제 인식 및 대응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세혁은 규범 논리적 역설들이 결국 조건문의 성질을 ‘단순함의(material implication)’로 이해하 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256-260면), 이른바 ‘단순함의의 역설’이 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거나(257면 각주 59), 진정한 역설로 볼 수 없다는(260면)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생각건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견해들이 대부 분인 듯하다. 가령 사르토르(G. Sartor)는 무엇보다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으며(pp.418-419), 맥나 마라(Paul McNamara)는 규범논리 분야에서 유일하게 거의 보편적인 합의에 이른 부분이 바로 ‘표준의무논리(SDL)’ 또는 일반적으로 ‘단항규범연산자(unary deontic operator)와 단순함의의 복합 체제’로는 치좀의 역설에 등장하는 조건적 의무를 온 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점임을 밝히고 있으며, 그러한 한계의 구체적 원인이 조건문 에 대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p.38). 이와 비슷하게 힐피넨 (Risto Hilpinen) 역시 규범적 담론이 조건적 규범으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조건문 을 단순함의로 취급하는) 표준의무논리가 그러한 조건적 규범을 표현하는 데 충분치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p.502).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하에서 살펴보게 될 바와 같이, 20세기 후반 엄청나게 진행된 조건문에 대한 철학적 연구들이 일견 단순함의 의 역설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을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52) Benson Mates, 앞의 책, 33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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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법철학연구

었다.53) 말하자면 삼단논법과 조건문의 논리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률적 삼단논법을 둘러싼 중심 의제를 서술문의 삼단논법에서 당위

문의 삼단논법으로의 변용으로 잡으면서, 그 대전제에 사용되는 조건문의 성

질에 대해서는 무심코 “단순함의(material implication)”54) 개념을 답습하는 일

이 벌어질 법도 한 상황이었다.

한편 조건문의 논리에 대한 연구는 B.C. 3세기 전후 메가라-스토아(Megara-

Stoa)학파의 사상가들, 특히 필론(Philo), 디오도루스(Diodorus), 크리시푸스

(Chrysippus)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55) 조건문 자체가 각각 완전한 문장으로 되

어 있는 전건(antecedent 또는 protasis)과 후건(consequent 또는 apodosis)으로 이

루어진다는 점에서, 메가라-스토아 사상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을 이른바 문

장 단위의 논리(“sentential logic”)라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삼

단논법을 통해 발전시킨 개념(term) 및 술어(predicate) 단위의 논리(“logic of

terms”)와는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다른 것이었다.56) 조건문의 이해에 관

한 필론, 디오도루스, 크리시푸스 등의 견해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의 저작인 뺷피론주의 개요 Outlines of Pyrrhonism뺸를 통해서 전해지

고 있는데, 덕분에 오늘날의 학설 논쟁에 등장하는 주요 견해들이 매우 직관적

인 형태로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가 있

다.57)

53)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저작에서는 조건문 또는 조건적 진술에 상응하는 어휘조차 없다고 한다. 김영철, 뺷조건논리뺸(한신문화사, 1983), 14-15면 참조. 54) ‘material implication’의 번역으로는 종래 “실질적 함축”, “실질함언”, “단순함의” 등이 제안되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마지막의 것을 취하기로 한다. 원래 용어는 러 셀(B. Russell)과 화이트헤드(A.N. Whitehead)에게서 유래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무슨 ‘실질’이나 ‘질료’를 가리키는 점이 없으며, 오히려 조건문에 대해 지극히 단순 화된 이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나아가 함의 (implication)라는 말이 등장하는 일반적인 문맥에 비추어, ‘material implication’이 라는 명칭 자체가 사용/언급 구별(use/mention distinction)에 대한 혼동을 보여 준 다는 콰인의 비판 이후, 근래에는 이와 같은 명칭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늘고 있 어서, 점차 ‘material conditional’이라고 부르는 추세이다. 55) David H. Sanford, If P, then Q: Conditionals and the Foundations of Reasoning, 2nd Edition (Routledge, 2003), pp.13-29; 김영철, 앞의 책, 14-28면 참조. 56) David H. Sanford, 앞의 책, pp.14-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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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51

아래에서는 장을 달리하여 위의 사상가들의 견해 및 그것의 현대적인 재등

장의 문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뺷피론주의 개요뺸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을 확인하고, 그것이 어떻게 단순함의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쟁과 연결되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조건문을 간단히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오늘날의 학설로서 스탈

네이커(R. Stalnaker), D. 루이스(D. Lewis), 아담스(Ernest W. Adams) 등의 견해

를 간략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Ⅳ. 조건문의 이해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규범이 조건문의 형식으로 기술된다는 점은

곧 규범을 구성하는 의미 요소들이 애초에 ‘조건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

내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들의 조직·결합을 언어적으로 포

착하는 방식이 바로 조건문의 사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건과 후건이라는

두 개의 문장이 결합하여 하나의 조건문을 이룬다고 할 때, 양자는 도대체 어떠

한 결합을 한 것인가? 그러한 문장들 사이의 언어적 결합이 구현해 내고 있는

의미들의 조직·결합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논의는 사실 매우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필론(Philo)은 참인 조건문이란 참에서 시작하여 거짓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라

고 말한다(예: 지금은 낮이고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만일 지금이 낮이라면,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디오도루스(Diodorus)는 그것을 참에서 시작하여 거짓

으로 끝날 가능성이 과거에도 없었고 또한 현재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

면, 방금 예로 든 조건문은 거짓인데, 왜냐하면 만일 지금이 낮임에도 내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 조건문은 참에서 시작하여 거짓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사물

57) 예컨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방식은 필론의 견해 와 완전히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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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법철학연구

을 이루는 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을 이루는 원자가 존재한다’는 참이다. 언

제나 이 조건문은 거짓인 것, 즉 ‘사물을 이루는 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시작하

고, 또한 (그에 의하면) 참인 것, 즉 ‘사물을 이루는 원자가 존재한다’로 끝나기 때문이

다. 연계성(connectedness)을 도입하는 사람들은 조건문의 후건(consequent)을 부

정하면 그것이 전건(antecedent)과 충돌하게 될 때 비로소 조건문이 참이라고 말한

다. 그들에 의하면, 방금 언급한 조건문은 거짓이 되겠지만, 반면에 ‘만일 지금이 낮

이라면, 지금은 낮이다’는 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의미(meaning)를 기준으로 판단

하는 사람들은 조건문의 후건이 전건 안에 은연중에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조건문이

참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만일 지금이 낮이라면, 지금은 낮이다’(나아가 되

풀이식의 조건적 진술 모두)는 거짓이다. 어떤 것도 그 자신 안에 들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58)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전하는 네 가지 견해 중 첫째와 둘째 견해는 각각 필

론과 디오도루스의 것이지만, 셋째와 넷째 견해는 누구의 것인지 명시되어 있

지 않다. 하지만 학설들은 셋째 견해, 즉 “연계성을 도입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바로 크리시푸스의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59) 한편 넷째 견해,

즉 “의미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메가라-스토아 사상가의 것

이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자의 주장을 소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60)

필론의 견해에 의하면 ‘어떤 조건문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전건이 참일 때 후

건이 거짓이어서는 안 된다.’61)는 점이 조건적 결합이 뜻하는 바의 전부이다.

디오도루스의 견해는 시간 개념(temporality)을 도입함으로써 조건적 결합의

정도를 다소 강화하고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필론의 견해에 바탕

을 두고 있다.62) 그러나 크리시푸스의 견해는 조건적 결합이 뜻하는 바를 매우

58) Sextus Empiricus, Outlines of Pyrrhonism, II, s.110-s.112. Julia Annas & Jonathan Barnes (ed.), Sextus Empiricus―Outlines of Sceptic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95-96. 59) David H. Sanford, 앞의 책, p.24; 김영철, 앞의 책, 19면 참조. 60) David H. Sanford, 앞의 책, p.25; 김영철, 앞의 책, 20면 참조. 61) 레셔(N. Rescher)는 이를 스토아 사상가들의 논의에서 “공통 핵심(common core)”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N. Rescher, Conditionals (MIT Press, 2007),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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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53

다르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기준은 한마디로 전

건과 후건 사이의 연계성(connection), 정합성(coherence) 또는 양립가능성

(compatibility)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63) 이를 요구함으로써 필론이나 디오도

루스의 기준에 의할 때 허용하게 되는 ‘공허하게 참인(vacuously true)64) 조건

문’, 즉 단순히 전건이 거짓이기 때문에 후건의 참 거짓 여부와 무관하게 무조

건 참이 되는 조건문의 출현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스

토아 사상가들의 논의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는 네 번째 견해에서

는 조건적 결합이 뜻하는 바에 대하여 ‘전건의 의미 속에 후건의 의미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훨씬 강력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65)

필론의 견해는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뺷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뺸에

서 제시한 조건문의 이해 방식과 동일하다. 이들은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

해하는데,66) 이에 따르면 ‘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라는 조건문은 ‘p이면서

동시에 q가 아니지는 않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또한 후자는 다시 ‘p

가 아니거나 또는 q이다.’와 논리적으로 동치이므로 결국 다음과 같은 진리표

를 작성해 볼 수 있다.

62) David H. Sanford, 앞의 책, pp.27-28; 김영철, 앞의 책, 18-19면; N. Rescher, 앞의 책, pp.48-49 참조. 63) David H. Sanford, 앞의 책, pp.20-26; 김영철, 앞의 책, 19면; N. Rescher, 앞의 책, p.49 참조. 64) D. Lewis, Counterfactuals (Blackwell Publishers, 2001), p.11 및 p.16 참조. 65) 이 기준은 종종 상관성(relevance), 도출가능성(derivability), 또는 분석성 (analyticity)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철, 앞의 책, 57면 및 62-63 면 그리고 79면; N. Rescher, 앞의 책, p.49 참조. 66) A.N. Whitehead & B. Russell, Principia Mathematica Volume Ⅰ, 2n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 p.7 참조.

p q p⊃q ~(p·~q) ~p∨q

T T T T T

T F F F F

F T T T T

F F T T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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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법철학연구

단순함의로 이해된 조건문은 ‘전건(p)의 진리치가 참인데, 후건(q)의 진리치

는 거짓인 경우’에만 거짓이 되며, 이는 필론의 기준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

런데 단순함의로 이해된 조건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건이 거짓이기

만 하면 후건의 참 거짓 여부와 무관하게 무조건 참이 되어 버린다. C.I. 루이

스(C.I. Lewis)는 이를 “단순함의의 역설”67) 중의 하나로 지적하고, 이러한 역설

들을 발생시키지 않는 대안적인 조건문의 이해 방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지

하는 바와 같이 이 과정에서 그는 현대적인 양상논리학을 만들어 냈는데, 훗날

폰 라이트가 규범양상을 유추하는 데 활용하기도 했던 진리양상의 범주68)를

조건문에 도입하여, 처음부터 ‘전건이 참일 때 후건이 거짓일 수 없음’이라는

제약을 지니는 “엄밀함의(strict implication)” 개념으로써 조건문을 이해하려 했

다.69) 그렇게 되면 ‘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라는 조건문은 ‘p이면서 동시에

q가 아닐 수는 없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동치가 되고, 이는 곧 크리시푸스가

말했던 “후건을 부정하면 그것이 전건과 충돌하게 될 때 비로소 조건문이 참”

이라는 조건적 결합의 기준으로 수렴하는 것이다.70)

하지만 C.I. 루이스가 조건문의 전건과 후건 사이의 정합성을 요구함으로써

우연적 참 거짓과 구별되는 필연적 참 거짓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음

에도, 단순함의의 역설을 해소한다는, 혹은 달리 말해서 우리의 언어 사용의

직관에 부합하는 함의 개념을 찾는다는, 목표에서는 철저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건문을 엄밀함의로 이해하더라도 거의 유사한 역설들이 발생하기

67) C.I. 루이스가 단순함의의 역설로 지적하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① 거짓 명제는 어떠한 명제라도 함의한다. ② 참인 명제는 어떠한 명제에 의해서나 함의된다. ③ 임의의 두 거짓 명제는 서로 동치이다. ④ 임의의 두 참인 명제는 서로 동치이다. ⑤ 임의의 두 명제는 서로 일관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독립적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철, 앞의 책, 41면 및 45-46면 참조. 68) 대표적으로 필연성(necessity), 가능성(possibility) 등을 들 수 있다. 69) 김영철, 앞의 책, 44면 이하 참조. 본문의 제약을 달리 표현하자면 ‘전건과 후건 사 이의 정합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0) David H. Sanford, 앞의 책, pp.68-69. 샌포드(David H. Sanford)에 의하면 크리 시푸스만이 아니라 디오도루스 또한 조건문에 대한 양상논리적 설명을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디오도루스는 필연성과 가능성을 시간 개념과 결 합하는 방식을 취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는 같은 책, p.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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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55

때문이다.71)

그렇다면 다시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를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필론 그리고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방식은

조건문의 진리치를 오로지 전건의 진리치와 후건의 진리치를 조합하여 (함수

계산처럼) 결정하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전건과 후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접

근 방식은 한마디로 조건문에 진리함수성(truth-functionality)을 인정하는 방식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보자.

[13] 변호사들은 모두 잘생겼다.

[14] 못생긴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다.72)

[13′] 만일 어느 사람이 변호사라면, 그는 잘생겼다.

[14′] 만일 어느 사람이 못생겼다면, 그는 변호사가 아니다.

앞 장(Ⅲ)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주어진 문장을 그 의미를 유지하면서 조

건문의 형태로 다시 쓸 수 있다. 그런데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한다는 것

71) C.I. 루이스 자신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엄밀함의의 역설”로 지 적한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① 모순명제는 어떠한 명제라도 함의한다. ② 분 석명제는 어떠한 명제에 의해서나 함의된다. ③ 임의의 두 모순명제는 서로 동치이 다. ④ 임의의 두 분석명제는 서로 동치이다. 보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영철, 앞의 책, 54-56면 참조. 단순함의의 역설 및 엄밀함의의 역설을 제거하기 위한 로타 필립스(Lothar Philipps) 등의 규범논리적 노력과 관련하여 Ulfrid Neumann, 윤재 왕 역, 뺷구조와 논증으로서의 법뺸(세창출판사, 2013), 61면 이하 참조. 72) 이것은 원래 바인베르거가 거짓인 전제로부터도 타당한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 명하기 위해 든 예를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조금 수정한 것이다. 바인베르거가 거짓인 전제의 예로 들었던 것은 “변호사 중에는 도둑이 없다.”였는데, 이로부터 “도 둑 중에는 변호사가 없다.”는 결론을 타당하게 이끌어 낼 수 있다. O. Weinberger, “Against the Ontologization of Logic: A Critical Comment on Robert Walter’s Tackling Jørgensen’s Dilemma”, Ratio Juris 12(1), 1999, p.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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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법철학연구

은 [13′]에서 ‘변호사임’과 ‘잘생김’ 사이에 어떤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만한 관

계가 (그것이 정합성이건 분석성이건)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

령 일일이 관찰해 봤더니 변호사들이 하나같이 잘생겼다면 [13′]은 참이 될 것

이고,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 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양자의 사이에는

인과성(causality) 같은 강한 연결고리가 아니라, 기껏해야 통계적 상관성

(correlation)을 상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73) 다시 말해서 이 같은 접근 방식에

의하면, [14′]를 읽고서 ‘잘생김’이 ‘변호사임’의 요건일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형적인 법규범의 문장에서 전건과 후건은 ‘요건-효과’의 관계에 놓

이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15]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변호사가 될 수 없다.

  1. 파산선고를 받고 복권되지 아니한 자(변호사법 제5조)

[15′] 만일 어느 사람이 파산선고를 받고 복권되지 않았다면, 그는 변호사가 될

수 없다.

[15′]를 읽고서 우리는 ‘파산선고 이후 미복권’이 ‘변호사임’ 여부를 판가름하

게 될 결정적인 요건이 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법규범의 언

어적 표현으로서 조건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15′]를 단순함의로 이해하고

거기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는 접근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74) 나아

73) 주지하듯이 ‘통계적 상관성’은 그 자체로 ‘인과성’을 함의하지 않으며, 그저 “무의미 한 우연의 일치”로 인해서 관측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사례로는 J. Gilligan, 이희재 역, 뺷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뺸(교양인, 2012), 19-20면(‘연도별 슈퍼볼 우승팀의 소속 컨퍼런스와 주가 등락의 통계적 상관성’); Franz H. Messerli, “Chocolate Consumption, Cognitive Function, and Nobel Laureates”,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67(16), 2012, pp.1562-1564(‘인구대비 초콜릿 소비 량과 노벨상 수상자 배출 정도의 통계적 상관성’) 참조. 74) 심헌섭은 현대논리학의 단순함의 개념이 “조건문의 의미파악에 명확을 기했다.” 고 평가하면서, 그것이 “모든 조건문의 ‘전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공통적’인 의미”라 고 말한다. 그리고 슈라이버(R. Schreiber)를 인용하면서, 오늘날 “법규범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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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57

가 ‘요건-효과’의 틀로 규정된 전형적인 법규범의 해석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

도, 널리 규범적 문맥에서 그러한 접근 방식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의사가 응급실의 간호사에게 “만일 내일 아침까지 이 환자가 살아 있으면, 붕대

를 갈아 주도록 하세요.”라고 말했다. … 이 말은 “이 환자가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

지 않도록 하거나, 혹은 붕대를 갈아 주도록 하세요.”라는 말과 동치이다. 간호사는

환자의 얼굴을 베개로 눌러 죽였다. 진리함수적 해석에 따르면, 이 간호사는 의사

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75)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결론은 단지 규범논리의 체계에 한해서만 유지될 수 있

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서술문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해 온 논리학적 체계에서

는 여전히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방식을 따라야 하는가? 베넷

(Jonathan Bennett)에 의하면 현재 조건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76) 단순함의의 역설이 지적된 이래 이 물음에 대해서는 부

분적이든 전면적이든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는 논의의 흐름들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중 하나의 논의 흐름은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는 것이

도 이러한 단순함의 개념으로 표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심헌섭, 앞의 책(2001), 285 면 참조.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건 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필론 그리고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방식은 그저 조건문 의 ‘공통적’인 ‘일부’ 의미를 무고하게(innocently)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 할 수 없으 며, 매우 위축된 특정 의미를 제외하고는 조건문에 어떠한 의미 관계도 추가되지 못 하게 막는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악은 특히 법규범의 언어적 표현 으로서 조건문을 이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75) D. Edgington, “Indicative Conditional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4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 anford.edu/archives/win2014/entries/conditionals/, p.50 참조. 76) Jonathan Bennett, A Philosophical Guide to Conditionals (Clarendon Press, 2003), pp.1-2 및 p.21 참조. 다만, 베넷은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할 때 참이 되 는 우스꽝스러운 문장들(단순함의의 역설 중 ①, ②를 참조)에 대하여 학자들 대부 분이 그것을 “거짓(false)”이라 밝혔다고 쓰고 있지만(p.21),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 는 다소 부정확한 기술이다.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조건문에 아예 진리치 자체 를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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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법철학연구

잘못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일찍이 굿맨(N. Goodman)은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게 되면 (그 정의상 전건이 거짓인) 이른바 ‘반사실적 조건

문(counterfactuals)’은 언제나 모두 참이 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문제

점을 지적한 바 있다.77) 비슷한 문맥에서 스탈네이커 역시 조건문이란 ‘전건

명제와 후건 명제의 진리치들의 함수(진리함수)인 조건 명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78) 조건문의 진리치는 단순히 전건의 진리치와 후건의 진리치만을 기

계적으로 조합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79)

예를 들어,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자. “만일 네가 그 전선을 건드리면, 너

는 감전될 거야.”(*) 당신은 전선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발언은 참인가

거짓인가? 진리함수성을 부정하는 견해에 따르면, 이는 전선에 전류가 흐르고 있는

지 여부, 당신이 차단 피복으로 보호되고 있는지 여부 등에 달려 있다. 로버트 스탈

네이커(1968)의 설명은 이러한 유형이다: 당신이 전선을 건드리는, 그리고 그 외에

는 실제 상황(actual situation)과 차이가 거의 없는, 가능적 상황(possible situation)

을 생각하라. (*)는 당신이 그와 같은 가능적 상황에서 감전되는지 여부에 따라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된다.80)

반사실적 조건문은 단순히 조건문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고

실험의 공통 언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에 대한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가설을 도입하거나 아직 실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요소를 실현된 것으

로 가정해 보고, 그와 같은 가설 및 가정으로부터 타당하게 추론되는 현상들이

관측되는지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으로 도약하는 과정은 어김없이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그 가설 및 가

77) N. Goodman, “The Problem of Counterfactual Conditionals”, The Journal of Philosophy 44(5), 1947, p.113 참조. 78) R. Stalnaker, “A Theory of Conditionals”, in Nicholas Rescher (ed.), Studies in Logical Theory (Blackwell, 1968), p.98 참조. 스탈네이커는 “진리함수”가 아니라 “선택함수”로 조건문을 설명하려고 한다. 79) R. Stalnaker, 앞의 글(1968), p.100 참조. 80) D. Edgington, 앞의 글(2014),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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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59

정이 사실에 대한 그때까지의 통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건에서 추

론해 내는 것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심지어 그 관측 여부도 불문하고) 당해 조건문의

진리치가 참이라 결정된다면, 이는 사고 실험이라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

들어 버린다.81)

결국 스탈네이커는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진리치

를 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새로운 의미론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는데, 그 실마

리를 제공한 것은 크립키(S. Kripke)의 이른바 ‘가능세계 의미론(possible worlds

semantics)’이었다.82)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크립키의 방식은 우

선 양상논리의 기본 관념들을 표현하는 데 적합할 뿐 아니라,83) 둘째, 조건문

자체가 일견 “가능적 상황”에 대한 것이라는 직관과 ‘가능세계’ 개념이 잘 부합

하고,84) 셋째, (바인베르거가 지적했던 것처럼) 추론의 타당성은 전제와 결론이

“실제로” 참인지 여부, 다시 말해서 “현실세계의 구조”와 일치하는지 여부와 무

관하므로, 어떻게 보면 논리학에서는 가능세계를 상정한 추론이라는 것이 이

미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85)

D. 루이스 역시 크립키의 가능세계 의미론을 통해서 반사실적 조건문의 진

리치를 판단하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는데,86) 그가 가장 먼저 밝히고

81)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게 될 경우, 반사실적 조건문은 (그 정의상 전건이 거짓이라는 이유로) 항상 참이 된다고 해야 하는 점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더욱 심 각한 문제는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반사실적 조건문이 동시에 참이 된다고 해 야 할 경우도 생긴다는 점이다. 마이클 무어(Michael S. Moore)는 다음 두 문장을 예로 들며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① 만일 로켓이 시속 18,000 마일 미만으 로 날았더라면, 그것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② 로켓이 (사실과 달리) 시속 18,000 마일 미만으로 날았더라도, 그것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났을 것이 다. (로켓이 실제로는 시속 18,000 마일 이상으로 날았을 때, 위 두 문장은 모두 반 사실적 가정을 전건으로 지니는 셈이다.) Michael S. Moore, Causation and Responsibility: An Essay in Law, Morals, and Metaphysics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373 및 p.376 참조. 82) R. Stalnaker, 앞의 글(1968), p.103; D. Edgington, “On Conditionals”, Mind N/S 104(414), 1995, p.250 참조. 83) Paul McNamara, 앞의 글, pp.16-17; D. Edgington, 앞의 글(1995), p.250 참조. 84) D. Edgington, 앞의 글(1995), p.250 참조. 85) O. Weinberger, 앞의 글(1999), p.97 참조. 86) D. Lewis, 앞의 책(2001), p.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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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법철학연구

있는 것은 반사실적 조건문을 단순함의 또는 (필연성을 의미하는 연산자가 덧붙

여진 단순함의라 할 수 있는87)) 엄밀함의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88) 나아가 D. 루

이스는 스탈네이커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이론의 한 특수한 경

우로 간주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89)

다른 하나의 논의 흐름은 조건문이 아예 진리치를 가지지 않는다는 주장으

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는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진리

치 자체는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앞서의 대안적 논의들과 구별된다.

아담스에 의하면 조건문은 진리치를 가지지 않으며 다만 확률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90) 이와 관련하여 조건문의 확률(probability of a conditional)을

이른바 조건부 확률(conditional probability)과 동일시하는 매력적인 가설이 아

담스91)와 스탈네이커92)에 의해 각각 제시된 바 있다. 학설들은 이를 아담스 가

87) D. Lewis, 앞의 책(2001), p.4 참조. 88) D. Lewis, 앞의 책(2001), p.11 참조. 다만, D. 루이스는 직설법적 조건문 (indicative conditionals)에 대해서는 여전히 진리함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단순 함의로 이해하는 종래의 방식에 머물고자 한다는 점에서, 반사실적 조건문을 포함 하는 조건문 일반에 대한 새로운 통합적 설명 체계를 모색했던 스탈네이커의 입장 과 구별된다. D. 루이스는 자신의 태도를 단지 “너무 많은 것들을 새로 시작해야 한 다는 부담(too much of a fresh start)”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하지만, 스탈네이커는 이러한 타협책이 성공적일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D. Lewis, “Probability of Conditionals and Conditional Probability”, in William L. Harper, R. Stalnaker & Glenn Pearce, Ifs: Conditionals, Belief, Decision, Chance, and Time (D. Reidel Publishing Company, 1981), p.136; R. Stalnaker, “Conditional Propositions and Conditional Assertions”, in Andy Egan & Brian Weatherson (ed.), Epistemic Modal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p.228-229 참조. 89) D. Lewis, 앞의 책(2001), p.78 참조. 90) 한편, 아를로 코스타(Horacio Arlo-Costa)는 확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서도 조 건문에 진리치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으로 예르덴포르스(P. Gärdenfors)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별도로 다루지 않기로 한다. Horacio Arlo-Costa, “The Logic of Conditional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6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 ives/win2016/entries/logic-conditionals/, pp.8-11 참조. 91) Ernest W. Adams, The Logic of Conditionals (D. Reidel Publishing Company, 1975), p.3 참조. 92) R. Stalnaker, “Probability and Conditionals”, in William L. Harper, R. Staln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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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61

설(Adams’ Hypothesis) 및 스탈네이커 가설(Stalnaker’s Hypothesis)이라고 부르

는데, 사실상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93)

[아담스/스탈네이커 가설] p(if A, then B)=p(B∣A)=p(A·B)/p(A)

단, p(A)≠0 94)

생각건대, 이들 가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봄으로써 역

설을 초래하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고전적인 견해를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전건과 후건 사이의 관계에 (인과성과 같은 특별한 가치를 무차별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일단 통계적 상관성이라는 명목상의 가치 내지 열린 가치를 상정하는 유

연성을 취함에 더해, 램지(F.P. Ramsey)의 통찰95)이 가리키듯 사람들이 저마다

의 “믿음의 정도(degrees of belief)”를 반영하여 구체적인 조건문의 내용에 따라

그 통계적 상관성의 의미를 달리 수용하는(accept) 것이라는 확률론적인 해석

을 가함으로써,96) 결과적으로 단순함의의 역설을 피하면서도 보다 정교한 계

& Glenn Pearce (ed.), 앞의 책(1981), pp.107-128 참조. 주의할 점은 아담스와 달 리 스탈네이커는 여전히 조건문에 진리치를 부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 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조건문의 확률적 이해와 조건문에 대한 의미론 체계 사 이에 존재하는 “형식적·직관적 유사성(formal and intuitive parallels)”에 주목함 으로써 “귀납논리(inductive logic)와 조건논리(conditional logic)의 연계” 방안을 모색하려 한다. 이에 대해서는 같은 글, p.126; R. Stalnaker, 앞의 글(1968), p.111 참조. 93) David H. Sanford, 앞의 책, p.246 n.20 참조. 94) 조건부 확률의 공식 ① p(B∣A)=p(A·B)/p(A)으로부터 즉각적으로 ② p(A∣ B)=p(B·A)/p(B)임을 알 수 있는데, p(A·B)=p(B·A)이므로 ①, ②를 합치면 ③ p(B∣A)=p(B)·p(A∣B)/p(A)이 도출된다. 이것이 저 유명한 베이즈 정리(Bayes’ rule)이다. 95) 아담스와 스탈네이커뿐만 아니라 널리 현대의 조건문에 관한 논의에 가장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는 램지는 “General Propositions and Causality”(1929) 라는 원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두 사람이 ‘만일 p라면, q일까?’를 놓 고 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둘 다 p에 대해 확신은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p를 자신들 의 지식의 축적물에 가설적으로 더하고서 그러한 토대 위에서 q에 대해 논쟁하고 있 는 셈이다. … 그들은 p가 주어졌을 때의 q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의 정도를 확정시키 고 있는 것이다.” D. Edgington, 앞의 글(2014), p.15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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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법철학연구

산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조건문의 논리를 재구성하고 있는 점 때문일 것

이다.

아담스/스탈네이커 가설을 염두에 두고 에징턴(D. Edgington)의 다음과 같은

논의를 따라가 보면, 조건문을 확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것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차이를 빚게 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단순함의 방식의 설명에 의하면, ‘만일 A라면, 그러면 B이다.’라는 점을 거의 확

신한다는 것은 곧 p(A⊃B)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p(A⊃B)는 p(B∣A)

와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두 가지 특수한 경우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첫째, 만일

p(A·~B)=0이고 p(A)는 0이 아니라면, p(A⊃B)=p(B∣A)=1, 즉 100%. 둘째, 만일

p(A)=100%이라면, p(A⊃B)=p(B∣A)=p(B). 이 밖의 모든 경우에서 p(A⊃B)는

p(B∣A)보다 크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p(A·~B)와 p(A·~B)/p(A)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A·B, A·~B, ~A} 형태의 분할을 생각해 보자.

A·B A·~B ~A

  • p(A)=p(A·B)+p(A·~B)

p(A·~B)가 전체 공간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것이 A 영역 즉 A가 참이 되

는 영역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작다. 단, p(A·~B)=0 또는 p(~A)=0인 특수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p(~B∣A)

가 p(A·~B)보다 크다. 이제 p(A⊃B)=p(~(A·~B)), p(A·~B)+p(~(A·~B))=1.

또한 p(B∣A)+p(~B∣A)=1. 그러므로 p(~B∣A)>p(A·~B)로부터 p(A⊃B)>

p(B∣A)가 도출된다.

단순함의를 지지하는 견해와 확률적 이해를 지지하는 견해는 p(~A)가 높고

p(A·B)가 p(A·~B)보다 매우 작을 때 극적으로 갈리게 된다. p(~A)=90%,

p(A·B)=1%, p(A·~B)=9%라고 해 보자. p(B∣A)=10%, p(A⊃B)=91%. 예컨대,

나는 수(Sue)가 일자리를 제안 받지 못할 것(~O)이라고 90% 확신하고, 만일 그녀

가 제안을 받았음에도 이를 거절할(D) 가능성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

96) 이 점에서 아담스와 스탈네이커가 조건문에 부여하는 확률은 기본적으로 ‘주관적 확률(subjective probability)’이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램지의 주관적 확 률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영의, 뺷베이즈주의: 합리성으로부터 객관성으로의 여정뺸 (한국문화사, 2015), 5면 이하 및 33면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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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63

다. 즉 p(D∣O)=10%. p(O⊃D)=p(~O∨(O·D))=91%.97)

다만, 아담스/스탈네이커 가설에 대하여, D. 루이스는 조건문의 확률이 사

실상 조건부 확률일 수 없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이른바 “triviality

results”98) 증명)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99) 이에 대해 아담스는 D.

루이스가 “조건문의 확률”을 “조건문이 참일 확률”로 전제하고 있음100)을 지적

하며, 그의 증명이 갖는 함의는 어디까지나 ‘조건문에 진리치를 부여하면서, 언

제 그것이 참이 되는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truth-conditional analysis)’101)가

이론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것일 뿐,102) 자신과 같이 기본적으로 조건문이 진리

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론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에 의하면 D. 루이스의 증명은 오히려 조건문의 확률이 조건문이 참일

확률과 구별된다는 자신의 지론이 옳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것이라 한다.103)

이상으로 조건문을 이해하는 여러 방식들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

들 방식을 크게 양분하여 정리해 본다면, 조건문에 진리치를 부여하는 방식(러

97) D. Edgington,앞의 글(2014), pp.18-19. [이해의 편의를 위해 원문의 다른 곳에 등 장하는 그림을 가져와 *의 단서와 함께 삽입했고, 기호 표기를 본문의 다른 부분들 과 일치하도록 바꾸었음.] 98) D. Lewis, 앞의 글, in William L. Harper, R. Stalnaker & Glenn Pearce, 앞의 책 (1981), pp.129-147 참조. 99) 에징턴에 의하면, 반 프라센(Bas C. Van Fraassen)과 스탈네이커는 D. 루이스의 이러한 증명을 “날벼락(bombshell)”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D. Edgington, 앞의 글 (1995), p.271 n.38 참조. 100) D.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장가능성은 대체로 확률에 준한다. 왜 냐하면 확률은 참일 확률이고 화자는 진실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Assertability goes in general by probability because probability is probability of truth and the speaker wants to be truthful).” D. Lewis, 앞의 글, in William L. Harper, R. Stalnaker & Glenn Pearce, 앞의 책(1981), p.134 참조. 101) 아담스는 여기에 ①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봄으로써 진리함수성을 인정하는 고전 적인 견해와 ②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진리치 자체는 부여하 는 스탈네이커의 대안적 견해(가능세계 의미론)가 모두 포함된다는 점을 명확히 밝 히고 있다. Ernest W. Adams, 앞의 책, p.7 참조. 102) Ernest W. Adams, 앞의 책, p.5 및 p.8 참조. 103) David H. Sanford, 앞의 책, p.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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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법철학연구

셀·화이트헤드의 고전적인 방식, 스탈네이커·D. 루이스의 가능세계 의미론)과 그

렇게 하지 않는 방식(아담스·에징턴의 확률적 이해, 예르덴포르스의 비확률적 이

해)으로 나눌 수 있다.104) 사실 이러한 구분은 조건문의 본질, 또는 이른바 의

미들의 ‘조건적’ 조직·결합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

자는 조건문을 (전건과 후건으로 이루어진) ‘조건 명제(conditional propositions)’

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라고 보는 데 비해, 후자는 이를 (후건에 대한) ‘조건부의

주장(conditional assertions)’이라는 특수한 언어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

는 문장이라고 본다.105) 서두에서 사용했던 용어들로 다시 정리해 보자면, 이

들은 각각 조건문의 본질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과 “화용론적 접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06)

Ⅴ. 법학적 함의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제 의미들의 조건적 조직·결합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법학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

자. 앞서의 논의는 법규범을 구성하는 의미 요소들이 조건적으로 결합되어 있

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확실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

다. 요컨대, 그것은 바로 조건문의 형식으로 기술되는 법규범, 특히 전형적인

‘요건-효과’의 틀로 규정된 법규범의 해석·적용에 있어, 조건문에 진리함수성

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04) R. Stalnaker, 앞의 글(2011), p.229 참조. 여기서 스탈네이커는 전자를 조건문에 대한 “진리조건적(truth-conditional) 설명”으로, 후자를 “비진리조건적(non-truth- conditional) 설명”으로 부르고 있다. 105) R. Stalnaker, 앞의 글(2011), p.227; Horacio Arlo-Costa, 앞의 글, p.3 및 p.8; David H. Sanford, 앞의 책, p.91 참조. 106) 특히 조건문의 본질에 대한 “화용론적 접근”은 (자신의 초기 이론을 탈피한) 폰 라 이트, 콰인 등이 취했던 입장이기도 하다. R. Stalnaker, 앞의 글(2011), p.230 이하; David H. Sanford, 앞의 책, p.91 이하; Michael S. Moore, 앞의 책, p.382 이하; Michael Woods, Conditionals (Clarendon Press, 1997), p.12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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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65

첫째,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와 같은 방식은 특히 반사실적 조건문의 특

성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법적 추론

의 과정에서 시도되는 일련의 사고 실험에는 반사실적 조건문이 사용될 수밖

에 없다. 따라서 이 같은 규범적 사고 실험의 올바른 설계와 해석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조건문에 대한 고전적 이해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판례를 통해서 제시되는 몇 가지 규범적 사고 실험의 예를 생각해 보면, 대

법원이 반사실적 조건문을 통한 법적 논증 및 판단 기준의 제시를 직·간접적

으로 시도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연명치료의 중단

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환자의 의사

를 추정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사회상규에 부합된다.107)

호적법이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란 기재를 수정하는 절차규정을 두지 않은 이

유는 입법자가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입법 당시에는 미처 그 가능성과

필요성을 상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108)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사례(2009)에서는 환자가 이른바 “회복불가능한 사

망의 단계”에 진입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 또는 환자의 명시적 의사표시가

없는 상황에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때 반사실적 조건문을

활용한 논증에 기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성전환자 성별 정정 사례(2006)에서

도 ‘만일 입법자가 입법 당시에 그 가능성과 필요성을 상정했었더라면, 관련 절

차규정을 두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반사실적 조건문을 논리적 전제로 내세

우며 입법자의 의도를 가설적으로 추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09)

107) 대법원 2009. 5. 21. 선고 2009다17417 전원합의체 판결. 108)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109) 한편 본문의 예와 같이 반사실적 조건문을 통해 입법자의 의도를 가설적으로 추단 하는 것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찬반 논의를 법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고 그러한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로는 R. Dworkin, 앞의 책, 37-42면 및 456-459면 참조. 나아가 의도주의 해석론자가 반사실적 조건문을 활용할 때 ① 이른바 반사실적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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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법철학연구

스트라스펠드(R.N. Strassfeld)에 의하면, 오늘날 많은 법적 분쟁들에서 반사

실적 고찰이 실제로 수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실정법 영역의 법리들 아

래에서는 그와 같은 고찰에 기대지 않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110) 예컨대,

인과관계111)에 대한 판단 과정에서는 전형적으로 ‘만일 A가 없었더라도 B가

발생했을 것인가?’라는 질문(“but-for test”)에 대한 고찰, 즉 대안적·반사실적

역사를 전개시켜 보는 사고 실험이 수행되며,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액의 산정

과정은 결국 피해가 발생한 현실세계를 그렇지 않은 반사실적 가능세계와 비

교해 보는 토대 위에서 진행되고, 과실 여부의 판단 과정에서는 이른바 “합리

적 인간 기준(reasonable person test)”을 적용함으로써 현실의 행위자를 가설적

인 합리적 행위자로 대체해 보는 사고 실험이 수행된다. 마찬가지로 “회피가능

한 결과(avoidable consequences)”의 법리에 따라 손해배상을 일부 인정하지 않

을 경우에도 반사실적 고찰은 불가피하다.112) 심지어 당장 우리 법체계를 놓

고 보더라도, 구체적인 법률 조항의 일부가 아예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되어 있

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113)

(counterfactual intention)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 해석론을 확장하거나, ② 상충하 는 복수의 현실적 의도들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를 정하기 위해 반사실적 검증절 차(counterfactual test)에 의지하는 것 등이 결국 해석적 비결정성을 초래하므로 적 절치 않다는 비판으로는 Natalie Stoljar, “Counterfactuals in Interpretation: The Case against Intentionalism”, Adelaide Law Review 20, 1998, p.29 이하 참조. 110) R.N. Strassfeld, “If...: Counterfactuals in the Law”, The George Washington Law Review 60(2), 1992, pp.342-344 참조. 111) 현재 조건문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주로 인과관계의 본성을 해명하기 위해 수행되 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과관계라는 물리적 세계의 질서가 선험적으로 존 재한다기보다는, 조건문을 통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인접한 물리적 사 건들에 투사시킨 결과물이 바로 인과성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법학의 영역에 서도 인과관계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쟁점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안 타깝게도 인과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논의 성과를 법학적 시각에서 음미하 는 작업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112) R.N. Strassfeld, 앞의 글, pp.345-347 참조. 113) “… 그러나 그 무효부분이 없더라도 법률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인정될 때에는 나머지 부분은 무효가 되지 아니한다.”(민법 제137조); “… 당사자가 그 무효를 알 았더라면 다른 법률행위를 하는 것을 의욕하였으리라고 인정될 때에는 다른 법률 행위로서 효력을 가진다.”(민법 제138조); “… 그러나 채무자가 이행기에 이행하여 도 손해를 면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민법 제392조); “… 상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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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67

이상의 사례들에서 명시적·묵시적으로 활용되는 반사실적 조건문을 단순

함의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곧 법학의 영역에서 규범적 사고 실험이라는 것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법적 추론의 타당성을 검증·보장하는 논

리학적 체계로서 규범논리라는 것도 성립할 수 없음을 뜻할 것이다.

둘째, 구체적인 법적 추론의 쟁점과 관련해서는 특히 반대추론(argumentum

e contrario)에 관한 함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 글에서도 일단 간결하게나마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을 듯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반대추론은 유추와 더불어 특

수한 법적 추론의 방식으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반대추론과 유추가 가리키

는 추론의 방향은 막상 정반대일 뿐 아니라, 언제 반대추론을 하고 언제 유추를

하는지를 사전에 분명히 지시해 주는 기준이 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

서,114) 한편으로는 실천적 유용성이 거의 없다는 비판(H. Kelsen)에 직면해 왔

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해석자의 자의적 선택에 따른 결정을 무엇이건 합리화

해 버릴 위험성을 지닌다는 비판(K. Engisch)에 노출되어 왔다. 여기에다 최근

에는 반대추론의 방식 자체에 논리적인 결함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법이란 일정한 법률요건에 해당하면 일정한 법률효과를 주는 꼴을 취하여, “p

이면 q이다”라는 꼴로 짜여 있다. 이를 놓고 ‘p가 아니면 q가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안 된다. p가 아니면 q일 수도 있고 q가 아닐 수도 있다.115)

‘요건-효과’의 틀로 규정된 전형적인 법규범은 ‘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

라는 조건문의 형식을 취하는데, 반대추론이란 결국 이로부터 ‘만일 p가 아니

라면, 그러면 q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당

한(valid) 논증이라면 그 출발 명제에서부터 최종 명제에 이를 때까지 진리치가

주의를 하여도 손해가 있을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민법 제756조 제1항) 114) 나름의 체계적인 기준을 제시하려 했던 시도로는 Aleksander Peczenik, On Law and Reason (Springer, 2008), pp.323-328 참조. 115) 이창희, “조세법 연구 방법론”, 뺷서울대 법학뺸 제46권 제2호, 서울대 법학연구소, 2005, 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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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법철학연구

보존되어야 한다는 추론의 일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이다. 즉 원래의 규

범적 명제(‘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로부터 진리치를 보존하면서 논리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은 반대추론의 결과물(‘만일 p가 아니라면, 그러면 q가 아니

다.’)이 아니라, 규범적 대우명제(‘만일 q가 아니라면, 그러면 p가 아니다.’)일 뿐이

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조건문에 진리함수성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단

순함의로 이해하는 고전적 방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할 때 안전하

게 통용되었던 몇몇 추론 규칙들은 그러한 이해 방식을 따르지 않을 경우 그대

로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특히 위의 주장에서 동원하고 있는 대우 규칙

(contraposition)이 바로 그와 같은 규칙의 대표적인 예로 지목되고 있다.116)

[16] 만일 두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수의 합이 6이면(A), 적어도 하나의 주사위에

서 나온 수는 3일 것이다(B).

[16′] 만일 어느 주사위에서도 3이라는 수가 나오지 않으면(~B), 두 주사위를 굴

려 나온 수의 합은 6이 되지 않을 것이다(~A).117)

조건문을 확률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따르면, [16]의 전건(A)과 후건(B)에

대하여 그 경우의 수를 따져서 각각 p(A)=5/36, p(B)=11/36의 확률을 부여할

수 있으며, 또한 p(A·B)=1/36의 확률을 부여할 수 있으므로,118) [16]의 확률은

p(B∣A)=1/5이 된다.119) 하지만 [16]의 대우명제라 할 수 있는 [16′]의 확률은

21/25로 판이하게 계산된다.120) 따라서 진리치가 아니라 확률을 기준으로 생

116) 대우규칙 외에도 이행성 규칙(transitivity), 전건 강화 규칙(antecedent strengthening)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David H. Sanford, 앞의 책, p.95 이하 및 p.108 이하 참조. 117) David H. Sanford, 앞의 책, p.95의 예를 인용. 118) 36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두 주사위 모두 3이 나올 때만 A·B에 해당할 수 있다. 119) 아담스/스탈네이커 가설에 따라 p(if A, then B)=p(B∣A)=p(A·B)/p(A)=(1/36)/ (5/36)=1/5. 120) ① p(~A)=1-p(A)=31/36, ② p(~B)=1-p(B)=25/36, ③ p(~B·~A)=21/36,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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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69

각할 경우, 원래의 명제와 그 대우명제가 논리적으로 동치임을 보장하는 일반

적인 규칙이란 (서술문을 대상으로 한 논리의 체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121)

더욱이 이러한 결론은 조건문을 확률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취할 경우에

만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세계 의미론이라는 대안적 체계를 채택할 때도

마찬가지로 관철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22) 낯선 기호를 동

원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아래와 같이 간단한 예를 놓고 생

각해 보자.

[17] 만일 우리가 자식을 세 명 이상 두었다 하더라도(A), 우리가 자식을 열한 명

이상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B).

[17′] 만일 우리가 자식을 열한 명 이상 두었다 하더라도(~B), 우리가 자식을 세

명 이상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A).123)

실제로는 자식을 두 명 이하로 두고 있는 사람도, [17]에서와 같이 그 전건(A)

이 참인 가능세계를 상정해 볼 수 있고, 그러한 가능세계에서라면 과연 후건

(B)도 참이라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라는 판단

에 매우 쉽게 도달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17]의 대우명제인 [17′]을 놓고 생

각해 보면, 그 전건(~B)이 참인 가능세계를 상정하여 판단할 때 후건(~A)은 결

코 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조건문을 단순함의로 이해하는 전제에서 반대추론의 방

식이 원래의 명제와 진리치가 동일한 대우명제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p(if ~B, then ~A)=p(~A∣~B)=p(~B·~A)/p(~B)=(21/36)/(25/36)=21/25. 121) Ernest W. Adams, 앞의 책, p.14 이하 참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건문을 확률 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주관적 확률’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방 식을 규범논리의 체계에 적용한다면, 구성요건(법률요건)과 법률효과에 대해서도 각각 판단자의 ‘주관적 확률’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122) R. Stalnaker, 앞의 글(1968), p.107 이하; D. Lewis, 앞의 책(2001), p.34 이하 참조. 123) David H. Sanford, 앞의 책, p.109의 예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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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법철학연구

에 근본적으로 논리적 결함을 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선뜻 동

의할 수가 없다.124) 이러한 이 글의 입장은 일찍이 라이프니츠가 ‘도덕적 조건

문’에 특유한 추론 규칙으로 “유보(suspension)”125)를 추가했던 점과 비슷한 면

이 있으며, 최근 법적 추론의 문제와 조건논리의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몇몇 법철학자들의 입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반대추론 부

정론의 논리적 근거인) ‘대우 규칙’의 논리적 등가물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후건

부정식(modus tollens)’126)은 규범적 추론의 영역, 특히 법적 추론의 영역에서

는 안전하게 통용되지 않는다.127)

124) ‘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라는 조건문을 전건(p)의 충족을 조건으로 후건(q)에 대해 이른바 조건부의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는 화용론적 접근을 극단적으로 내세 우게 되면, 전건이 충족되지 않은 경우(~p)를 상정하는 반대추론의 상황은 조건문 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만일 p가 아니라면, 그러면 q가 아니다.’라는 결론은 원래의 조건문과는 무관한 것 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본문에서 소개한 반대추론 부정 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건문의 본질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을 이렇듯 완전히 무시해 버 릴 수 있는지 의문이며, 둘째, 설령 서술문을 대상으로 한 논리 체계에서 이러한 관 점이 수용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요건-효과’의 틀로 규정된 법규범에 대해서까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정 요건(p)의 충족을 조건으로 특정 효과 (q)를 발생시키는 법규범을 놓고 보면, 그것은 해당 요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p) 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해당 효과를 발생시 키지 않겠다고(~q)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일 수 있기 때문이다. 125) 이는 간략히 (A →B) →(~A →~B)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데, 별다른 설명이 없 더라도 이것이 반대추론을 의미한다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Alexandre Thiercelin, 앞의 글, p.207 참조. 126) 대우 규칙에 따르면 ‘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로부터 ‘만일 q가 아니라면, 그러 면 p가 아니다.’(대우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한편, 후건 부정식에 따르면 ① ‘만일 p라면, 그러면 q이다,’ ② 그런데 ‘q가 아니다,’ ③ 따라서 ‘p가 아니다.’라는 추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②와 ③을 하나의 조건문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대우명제임을 알 수 있다. 127) 상세한 내용은 G. Sartor, 앞의 책, pp.546-5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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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71

Ⅵ. 나가며

규범은 하나의 의미 그 자체로서 그것을 언어적으로 포착한 진술 또는 문장

과는 구별된다. 또한 규범을 형성하고 있는 세부적인 의미들 사이의 결합이 조

건문의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와 같은 의미들 사이에 존

재하는 조건적 관계라는 것도 하나의 의미 그 자체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즉 규범을 형성하는 의미들 사이의 결합은,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묵적

으로, 우리가 ‘조건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의미 있게 이루어짐을 확

인하였다. 요컨대 규범의 세계에 내재하는 의미들의 조건적 결합이라는 특성

을 언어적으로 구현하면 그것은 바로 조건문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규범의 질서 내지 체계로서 법의 본성을 탐구하는 다양한 법철학적 논의 중

에서 어떤 특별한 입장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규범이 이렇듯 조건문의 형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조건문의 형식을 취하

는 규범적 문장을 출발점으로 하여 법적 추론의 과정을 이어 감에 있어서 전통

적인 추론 규칙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

각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반론도 있을 수 없다. 서술문을 대상으로 발전해

온 논리학적 체계에서 통용되는 추론 규칙이 당위문으로 나타낸 규범을 대전

제로 하는 실천적 추론에도 그대로 유효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물론이고, 그

와 같은 추론 규칙이 유독 조건문과 관련해서는 (심지어 그것이 서술문으로 되어

있을 때조차!)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는 지적들이 이미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 글은 법철학적 관점에서 조건문의 형식과 관련된 규

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첫발을 힘겹게 내딛었다. 현대철학에서 가장 뜨거운

연구 주제 중의 하나로 꼽히는 ‘조건문’에 대해서 충분히 검토한다는 것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

에 관한 핵심적인 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출현하여 시간이 흐른 뒤에도 거듭

그 통찰력의 시효를 갱신해 가고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러한 사상적 논의

흐름에 참여하고, 천박한 수준으로나마 그 작은 부분이라도 곱씹어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38페이지

72 법철학연구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지만, 조건문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법학의 문제에

대한 판단의 척도를 제공할 수 있는 지점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한두 가지

만 꼽아 본다면, 본문의 말미에 언급했던 ‘반대추론’에 관한 본격적인 검토, ‘인

과관계’의 본성에 대한 탐구 등은 특히 법철학 분야와 관련된 논의를 기대해 봄

직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다채롭게 펼쳐져 있을 논의 지점

을 향해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는 데 부족한 이 글이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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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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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페이지

규범의 본질에 대한 탐구 77

Abstract

On Nature of Norms

- A Study of the Form of Conditionals -

128)

Joonseok PARK*

Norm is a sort of meaning itself and is thus different from statement or

sentence which depicts it in words. A norm consists of its constituents

through meaningfully putting them together to form the coherent meaning

of itself. The conditional relationships among those constituents are

themselves the members of the world of meanings, since the typical

linguistic form of norms belongs to the conditionals.

It may be the case that the linguistic form of conditionals reflects the very

connection among those constituents so long as their meaningful

association can be called to be done in a ‘conditional’ way.

Legal philosophers who investigated the nature of law as an order or

system of norms have written that norms are insolubly connected with the

form of conditionals. They, however, have not fully checked whether

traditional rules of inference could work out as well in the process of practical

reasoning where we are supposed to move from the ought-sentences, which

simultaneously to be conditionals. This paper aims to review the problem as

such.

This paper shows that studies of ‘conditionals’ as one of the themes most

devoted to the investigations of contemporary philosophy can contribute to

the legal sciences and philosophy by explicating genuine issues of law. The

new approaches to the nature of conditionals, differently from the classical

  • Professor in School of Law, Chonbuk National University.

44페이지

78 법철학연구

approach interpreting conditionals as material implications, have developed

either probabilistic understanding of conditionals, or the so-called possible

worlds semantics, or else. This paper claims that the new ideas as such

provide law the fresh sources on the basis of which old issues of law can be

taken prudentially.

당위문(ought-sentences), 조건문(conditionals), 단순함의(material

implication), 조건부 확률(conditional probability), 반사실적 조건문

(counterfactuals), 가능세계 의미론(possible worlds semantics), 반대

추론(argumentum e contrario)

색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