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이동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원본 파일: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pdf
변환 일시: 2026-04-09 22:43


1페이지

법철학연구 제19권 제1호: 205~220
한국법철학회 2016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64)

울프리드 노이만(Ulfrid Neumann)**1)

윤재왕 옮김***2)

오늘 강연에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법률과 판결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규

범적 차원을, 다른 한편으로는 법이론적 차원을 갖고 있는 주제이다. 규범적

차원에서 이 주제를 다룰 경우에는 법관이 어떠한 경우에든 법률에 구속되어

야만 하는지가 문제의 중심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법관이 원칙적으로 법률

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에

반해 이 주제를 법이론의 차원에서 다룰 때에는 법관이 과연 법률에 구속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법률이 마치 믿을 만한 내비게이션 장치처럼 법관에게

법률에 합치하는 결정에 도달하는 길을 매우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인지 아

니면 등산용 나침반처럼 법관에게 단지 그가 찾아야 할 결정이 있는 방향 정

도만을 알려 줄 뿐인지가 문제의 중심이 된다.

물론 이 두 차원에 걸친 문제는 법률가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씨름하던 전

  • 이 글은 필자가 2015년 10월 8일 한국법철학회 주최로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에서 행한 강연 “Gesetz und Richterspruch im nachpositivistischen Zeitalter”를 우 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법과대학 형법, 형사소송법, 법철학, 법사회학 담당교수. 본지 편집 자문위원. ***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페이지

206 법철학연구

통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 문제는 과거와는 사뭇 다르고 또

한 매우 절박한 형태로 제기된다. 그렇게 된 데에는 특히 두 가지 이유가 있

다. 첫 번째 이유는 지난 몇십 년에 걸쳐 법의 세계화(Globalisierung)로 인해

법원의 권력이 사실상 크게 강화되었다는 사정이다. 오늘날에는 법원의 판결

이 미치는 영향이 개별 국가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곤 한다. 이 점은 초국가적

법원의 경우에는 이 ‘제도의 논리’ 자체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

만 한 국가의 일반 법원의 판결도 다른 국가나 국가연합에 커다란 영향을 미

칠 수 있다. 예컨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의 헌법을 기준으로 유럽연

합의 법규범의 타당성을 심사하고, 이를 통해 유럽연합의 제도가 행한 법적

행위를 독일 헌법에 비추어 위헌이라고 심판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국제법

원의 판결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법관의 법률구속의 원칙을 무시

하고, 이로써 이 법원들이 갖고 있는 법적 권한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비난을

받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지난 몇십 년에 걸쳐 이루어진 국제적 차원의 법철학적 논

의의 전개양상과 관련이 있다. 이 전개양상을 개략적으로 표현한다면 법학적

사고가 법실증주의 이후 시대로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법

실증주의라는 개념은 두 가지 전제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법실증주의

는 법과 법률이 동일하다는 것, 즉 법률 바깥에는 법이 없으며 또한 법적 구

속력이 없는 법률(물론 법률이 일정한 절차를 정확히 준수하여 제정되었음을 전제

한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둘째, 법실증주의는 법질서의 완결성을

전제한다. 즉 법관에게 사전에 제시되어 있는 법질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례와 관련하여 이미 하나의 결정을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법관은 단지 법

률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결정을 자신의 판결로 선언하기만 해야 할 뿐, 결코

판결을 법관의 주관적 의지에 따라 구성하고 형성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를

전제한다.

이 두 가지 ‘실증주의적’ 전제는 법관의 법률구속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 전제, 즉 법과 법률이 동일하다는 전제는 규

범적 차원에 해당한다. 법과 법률의 동일성이란 법관이 법률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법적으로 볼 때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또한 법관으로 하

여금 법률로부터 벗어나라고 결코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법관이 현


3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07

저하게 부정의한 법률을 구속력이 없다고 취급해야 할 도덕적 권한 또는 의

무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법적인 차원의 물음과

구별되는 별개의 물음에 해당한다. 두 번째 전제는 법관의 법률구속과 관련

된 사실상의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법률구속이 법률의 규율내용을 넘어서까

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규칙플라

톤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법률구속은 어쨌든 가능하며, 이에 반해 규

칙회의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법률구속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나는 먼저 규범적 문제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하지만 오늘 강연은 법률구

속의 법이론적 가능성에 비중을 두게 될 것이다. 이 두 번째 차원의 맥락에서

나는 법이론적 분석의 결과가 과연 법실무의 인식적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지 아니면 사법시스템은 허구(Fiktion)적 성격을 갖고 있는 가정의 토대 위에

서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법질서가 법률의 총합일 뿐이라는 ‘실증주의적’ 견해는 오랫동안 법철학적

사고를 지배했고, 오늘날에도 다수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하

지만 이 견해는 현재 상당히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

는 국가의 자의 그리고 기본적인 정의원칙에 대한 조직적 무시가 단순히 법

률이 없다거나 법률을 위반하기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원칙에

반하는 자의적인 법률 자체를 제정, 공포함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다는 역사

적 경험이었다. 그 때문에 몇몇 법철학자들은 나치 불법체제를 통해 법실증

주의는 “사실상 경험적 실험을 통해 반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처럼 법실증주의에게 불법국가에 대한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에 대해서

는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이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나치 체

제의 극악한 불법은 그 당시 효력을 갖고 있던 법률에 대해 마치 노예처럼

복종한 탓이기보다는 있는 법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왜곡한 탓이었다. 그

렇지만 이러한 시대사적 맥락은 ‘법률= 법’이라는 등식으로부터 갈수록 멀어

져 가고 있는 오늘날의 전개과정의 배경을 이룰 뿐, 그 결정적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사이에 등장한 다른 요인들이 더욱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한 가지 요인은 법제정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힘입어 성립한 규범


4페이지

208 법철학연구

들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국제적 경제활동의 영역에서는 권한을 부

여 받은 기관을 통한 법률제정이 아니라, 경제적 거래에 참여하는 당사자들

의 승인에 힘입어 법적 규율로서 효력을 갖는 규칙들이 발전되어 왔다. 실례

로 이른바 ‘국제 상거래 관습법(lex mercatoria)’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국제

상거래에서 통용되는 상관습의 총체로서 대다수의 학자들이 법적 성격을 인

정하고 있다. 또한 법률규범이 아니라, 잠재적인 소송당사자들 사이의 약정에

기초하여 분쟁을 관할하는 중재법원이 정규 국가법원을 점차 배제하고 있는

현실 역시 국제상거래 관습법과 같은 사회적 법제정이 제도적으로 정착하고

있다는 증거에 해당한다.

두 번째 요인은 법제정행위가 아니라, 한 국가의 법문화 속에 표현되어 있

기 때문에 효력을 갖게 되는 법원칙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는 2013년에 사망한 미국의 법철학자 로날드 드워킨(Ronald Dworkin)이 불문

의 법원칙이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 사용한 유명한 사건 Riggs

vs. Palmer를 상기해 보면 될 것이다. 이 사건에서 핵심적인 물음은 “빨리 상

속을 받기 위해 피상속인을 고의로 살해한 상속인이 그의 살인행위에도 불구

하고 법률에 별다른 예외규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문제없이 상속을 받

을 수 있는가?”이다. 이 물음에 대한 드워킨의 대답―그리고 1889년에 이 사

건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뉴욕 법원의 재판부의 대답도― 은 ‘당연히 그

렇게 해서는 안 된다’이다. 그 근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중대한 불법으로부

터 이득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법원칙이고, 이 원칙이 구체적인 국가의 법률

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증주의 법모델에 대한 회의가 점차 확산되게 된 데에는 정치현실과 법철

학에서 보편적 인권이라는 사상에 부여하는 의미가 갈수록 증대했다는 사정

도 한몫을 했다. 물론 인권이 국제조약에 명문으로 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

고 이 점에서 보편적 인권 또한 법제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전형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인권이라는 사고형식에서 자연법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할 수

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실정헌법 또는 국제조약을 통해서만 효력을

갖게 되는 ‘인권’은 결코 인권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권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처럼 법실증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사실은 법관의 법률구속


5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09

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법률구속을 통한 법관의 법률적용 의무가 상대적으로

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법관은 법률이 법으로서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법률에 대항하여 법을 원용할 수 있다. 특히 법률에 대한 법의 우위

는 ‘법도덕주의’를 주창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법실증주의 진영에 있는 학

자들도 인정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실증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법률이 결코 효력을 가진 법이 아닐 때에도 법률에 구속된

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의 논증은 법과 법률은 동

일한 것이고, 따라서 법관의 법률구속과 법관의 법구속 사이에는 전혀 갈등

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 법률실증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

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실증주의’의 입장에 있는 다른 학자들은 하나의 법체

계에서 승인되고 있는 불문의 법원칙도 실정법에 속한다고 보고, 따라서 법

과 법률의 동일성 테제를 포기한다. 이러한 ‘포용적 법실증주의(inklusiver

Rechtspositivismus)’가 수행하는 특별한 역할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자세히 다

루도록 한다.

법관은 어떠한 전제조건하에서 절차상 정확하게 제정된 법률에 대한 승인

을 거부할 권한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비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

이나 라드브루흐 공식이다. 이 공식의 핵심적 내용에 따르면 법률이 ‘참을 수

없는 불법’일 때에는 그 법률은 법적 효력을 박탈당한다. 라드브루흐 공식을

지지하는 입장은 내가 볼 때에는 충분한 실질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른바

‘참을 수 없음-공식’은 법적 안정성이라는 법원칙과 정의라는 법원칙이 적절

한 균형관계에 놓이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법질

서에서나 법관은 그가 보기에 어떤 법률이 ‘참을 수 없는 불법’이라고 여겨지

면 곧바로 이 공식을 원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라드브루흐 자신은 그런 식으로 생각했고, 공식을 지지하는 대다수

학자들 역시 라드브루흐의 견해에 따르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따를 경우, 이

세계의 어떤 법질서에서든 참을 수 없는 부정의에 해당하는 법률은 효력을

갖는 법규범의 체계로부터 자동적으로 배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이

러한 법률을 무시하는 법관은 단지 이 법질서 내에서 효력을 갖고 있는 법을

지향할 따름이다. 만일 법관이 참을 수 없는 부정의로서의 법률을 적용하게


6페이지

210 법철학연구

되면 이는 객관적으로 법왜곡죄(Rechtsbeugung)의 형벌구성요건을 충족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때 문제의 법률을 정치체제의 법윤리적 기준에 따라 평

가해야 하는지 또는 구체적 법질서 스스로 현저하게 부정의한 법률에 대해서

는 승인을 거부할 법관의 권한을 승인하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

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하나의 특정한 법철학적 입장을 너무 과장한 것이

고, 법철학의 권한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법관이 구속당하는 법

은 법철학자들의 법이 아니며, 특정한 방향의 법철학이 제시는 법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법관이 구속되어야 할 법은 구체적인 국가와 구체적인 사

회의 법이다. 물론 구체적인 법적 공동체에서 무엇이 ‘법으로 여겨지는지는

이 법적 공동체의 기준에 따라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각각의

‘인식규칙(rule of recognition)’, 즉 법률 이외의 법규범이 승인되는지 여부 그

리고 모든 법률에 구속력이 부여되어야 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포용적’ 법실증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사고이다. 내 생각으로

는 포용적 법실증주의는 법원의 재판실무에 대해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정

도로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라드브루흐 공식을 예로 들어 포용적 법실

증주의를 견지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법관이 이 공식을 원용

하여 현저하게 부정의한 법률을 거부할 수 있는지 여부는 판결을 하는 법관

이 속해 있는 법체계의 인식규칙에 달려 있다. 독일 법질서의 경우 라드브루

흐 공식은 법체계에 통합되어 있다. 연방법원과 연방헌법재판소는 여러 번에

걸쳐 라드브루흐 공식을 원용했다. 다른 법체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특정한 법철학적 견해가 아니라, 해당하는

법체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실천이다. 법철학은 단지 이러한 인식규칙을

형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라드브루흐

공식을 신봉하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일 뿐이다. 즉 이 공식은 내가

보기에는 정의와 법적 안정성 사이에서 균형 잡힌 타협을 이루어 내고 있고,

따라서 실질적 측면에서 적절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공식이 법적 타당

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 공식이 반드시 한 법체계의 인식규칙에 통합되어

있다는 전제를 충족해야 한다.


7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11

지금까지의 내용은 법관의 법률구속에 관한 실증주의 모델의 첫 번째 요소

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 모델의 두 번째 요소에 대해서도 오늘날에는 커다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자연법을 거부하고 법과 도덕을 엄격히 분리하면서

스스로를 ‘법실증주의’ 진영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학자들마저도 법률은 원칙

적으로 법관에게 결정의 여지를 남겨 놓으며, 이 결정의 여지는 법관의 결단

을 통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률구속 자

체가―법률구속이 법적 명령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일단 접어 두자― 가능하

다는 사실 자체를 대다수 학자들은 부정하고 있다. 법률구속 이념에 대한 비

판은 무엇보다 해석학과 언어이론의 통찰에 근거하며, 이러한 통찰 자체에

대해서는 오늘날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해석학은―간단하게 표현한다면― 법률텍스트를 포함한 모든 텍스트의 의

미가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증명했다. 오히려 텍스트의 의미

는 이해의 생산적 과정 속에서 구성되고, 이 과정의 결과에는 예컨대 텍스트

의 영향작용사(Wirkungsgeschichte)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포함된다고 한

다. 언어이론에서는 ‘화용론적 전환’을 통해 단어들의 의미가 전적으로 커뮤

니케이션 과정을 거쳐 매개되고, 한 단어의 사전적(lexikalisch) ‘의미’가 이 단

어의 맥락적 ‘의미’를 미리부터 완벽하게 규정하지 않는다는 통찰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의 언어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법관이 법률로부터

구속력 있는 법적 규칙을 끄집어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저 법률을 해독하기

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사정을

잘 아는 재판실무가와 입법자라면 법관은 그저 ‘법률의 입’에 불과하다는 사

고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단순한 허구일 뿐이

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법관의 법률구속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오늘

날 법률에 흠결이 있을 때에는 법관 스스로 규칙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는 통찰을 훨씬 뛰어넘는다. 법관의 법률구속에 회의적인 현대의 이론들은

법률의 흠결과 같은 예외적인 특수한 상황에서만 특수한 규칙형성이 필요하

다는 사고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해석학과 언어이론은 법률텍스트를 통

해 이루어지는 구속 가능성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법관은 개개의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자신의 결정의 기초


8페이지

212 법철학연구

가 되는 법적 규칙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극단적 회의

주의에 대한 철학적 토대는 ‘해체(Dekonstruktion)’라는 철학적 접근방법이 제

공한다. 해체주의는 규칙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정의로운 판결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물론 법률구속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론들 가운데 몇몇은 분명 지나친 과

장의 소산일 뿐이다. 그렇지만 해석학과 언어이론의 통찰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단지 법이론이 법관의 법률구속 가능성과

관련하여 이러한 통찰로부터 과연 어떠한 결론을 도출하는지가 문제가 될 뿐

이다.

판결을 법률에 구속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고전적 기

술은 법률텍스트의 해석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고전적

법학방법론은 법률해석을 통해 법률구속을 보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의 배후에는 해석을 통해 법률텍스트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아직은

감추어진 상태에 있는 의미를 언어로 표현하면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

다. 그러나 해석학과 언어이론은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를 일관되게 불신한

다. 이른바 법률‘해석’은 이미 주어져 있는 법률의 의미를 인식하는 행위가 아

니다. 해석은 오히려 법적용자가 자신의 결정의 기초로 삼고자 하는 규칙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은 재생산적 활동이 아니라, 생산적 활동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

서 해석이라는 용어 대신에 법적용자에 의한 법률의 ‘구체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법률을 원용하여 판결을

정당화할 수 있기 위해 어떠한 규칙을 법률텍스트에 추가하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법관이 법률텍스트에 추가해야 할 규칙들의 선택을 법학방법론이 충

분히 조종할 능력을 갖추고만 있다면, 법률구속의 관점에서 법률해석의 창조

적 성격에 대해 우려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구속이 직접

법률의 내용을 통해 보장되든 아니면 법학방법론의 도구들을 통해 법관이 확

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추가규칙을 통해 보장되든 법률구속 자체가 보장되기

만 한다면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전제 자체를 법학방법론은 충족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른바 법률해석은 수많은 사례에서 결코 명확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


9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13

한다. 여러 가지 해석기준들은 결코 일관되고 정합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학문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법학은 이질적인 토대에 기초한

분과이다. 다시 말해 특정한 규칙을 인정하는 근거가 되는 유형 A1의 논거(찬

성논거)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 규칙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는 유형 A2의 논거

(반대논거)를 대비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법적 논증이 이질적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정은 법관의 판

결과 법학적 언명이 제기하는 정당성주장과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혼란

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판결과 법학에서 사용된 논거유형들은 결코 보편적으

로 인정되는 규범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도그마틱의 규칙을 형성할 때

예컨대 판결이 야기하는 사실상의 결과를 고려해도 되는지 그리고 만일 고려

해도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고려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일치된 견해

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법적으로 다툼이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찬성논거

와 반대논거―각각의 논거는 그 자체로는 타당성을 갖는다― 를 병렬적으로

또는 대립적으로 고려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각각의 결정근거들이 갖고

있는 비중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논거들의 관계는 일종의 역학관계

모델에 따라 생각해볼 수 있다. 즉 개별 논거들을 벡터로 해석하여, 이 벡터

의 진행방향과 비중이 규칙형성과 관련된 ‘정당한’ 결정을 그 결과로서 규정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논거를 저울질하는 이러한 과정이 과연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것인지는 논

거들의 상대적 비중을 결정하는 명확한 규칙을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

다. 법학방법론에서 이 물음은 해석기준의 서열에 관한 문제로 논의되고 있

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논란이 많다. 적어도 해석기준

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인정하는 한, ―법률구속의 원칙을 근거로― 역사적 입

법자의 의사나 법률문언과 같은 권위논거가 최상위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해석기준들 사이에 확고한 서열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동일한 유형의 논거일

지라도 각각의 정당화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비중을 갖게 된다는 사정 때문

에 결코 타당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결과논거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이 분명하

게 드러난다. 즉, 특정한 법률해석을 취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극히 다양한

정도로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정적 결

과라고 할 때에도 ‘썩 내키지 않는’부터 시작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예컨대


10페이지

214 법철학연구

법률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선고하게 되면, 이미 그 법률에 따라 발생한 상황을 청

산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가

있을 수 있다.

다른 모든 논거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입법자의 의사가 명확하고 명시적

으로 표현될 때도 있지만, 막연하고 불확실하게 표현될 때도 있다. 또한 단체

를 결성하여 절도를 한 행위를 가중 처벌하는 형법 제244조 제1항 2호에서

의미하는 ‘단체’가 두 사람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지를 결정해야 할 때의 문

언논거는 세 사람이 공범인 경우에 이 형벌구성요건에서 의미하는 ‘단체’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할 때의 문언논거에 비해 훨씬 더 커다란 비중을 갖게 된

다. 체계적 논거의 비중 역시 예컨대 논리적 모순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

면 단지 여러 법영역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가치평가의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

한 것일 뿐인지에 비추어 체계적 일관성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중요

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법적 해석방법―논증이론적으로 표현하자

면 법적 논증기준― 들의 이질성이라는 문제를 명백한 우선순위를 통해 해결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끝으로 ‘가능한 문언의 의미’가 법률을 해석과 적용과 관련하여 충분히 신뢰

할 만한 한계가 될 수 있다는 희망도 환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문언의 한계는

해석공동체의 합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단어들의

의미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언어공동체에 의해 구성된다는 언어이론적

통찰에 따른 필연적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과 유추의 경계는 사실상

어디에 양자의 경계가 있는지에 대한 해석자의 견해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법관의 판결을 법률에 구속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

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나치 불법체제

시대에 자행된 법률에 대한 우회적 해석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무

제한적 해석(unbegrenzte Auslegung)’이라는 표제어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와 같은 우회적 해석에 대해 그런 식의 해석은 법률과 법학방법론의 규칙을

잘못 다룬 탓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무용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오류는 오로

지 존재하고 있는 규약(Konvention)에 비추어서만 확인할 수 있다. 법체계 전

체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장악되고 관철될 때에는 개개의 결정뿐만 아


11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15

니라, 규약마저도 그 이데올로기에 복종한다.

그러나 오류는 오로지 기존의 규약에 비추어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은

회의의 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규약이 안정성을 갖는 한에서는 구속이 가능

하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정적 규약이 자리 잡는 논

리적 위치는 법실무에게든 법학에게든 법도그마틱이다. 법률구속은 법률의

문헌을 통해서가 아니라, 법도그마틱에서 승인된 규칙을 통해 보장된다.

법도그마틱의 규칙들은 법학방법론의 기준에 비해―물론 도그마틱 규칙들

은 당연히 법학방법론의 기준에 합치한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정확

하고, 따라서 훨씬 더 강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도그마틱 규칙들에

대해서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며, 따라서 하나의 도그마틱적 입장의 타당성

여부는 이에 대한 근거제시 가능성을 통해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서 법질서의 기준에 따라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법적 견해는 타당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근거제시 가능성’은 하나의 비교개념이다. 즉 하나

의 법적 견해는 좋은 견해일 수도 있고, 다른 견해에 비해 덜 좋은 견해이거

나 전혀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나쁜 견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서로 대립하는 법적 견해들의 ‘납득가능성(Vertretbarkeit)’이라는 현상이 발생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을 하겠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대한 중간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즉 법관이 법률에 대한 구속이 법률 자체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는 생각

은 오늘날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해석학과 언어이론에

의해 파괴되었다. 법학방법론의 규칙은 너무 모호하고, 무엇보다 너무나도 이

질적이어서 효율적인 법률구속을 보장하지 못한다. 법관의 결정은 도그마틱

의 규칙들을 지침으로 삼게 되며, ―여기에 반드시 덧붙여야 하는데― 특히

선례에서 승인된 도그마틱 규칙들을 지침으로 삼는다.

도그마틱 규칙을 통한 구속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즉 도그마틱

규칙들은 당연히 시간의 변화에 종속되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

는 법질서의 이데올로기적 토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체계변

경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이와는 달리 동일한 법체계 내에서


12페이지

216 법철학연구

이루어지는 도그마틱의 역동적 발전―오늘의 소수설이 내일의 다수설이 될

수 있다는 것― 을 보더라도 그렇고, 심지어 도그마틱 체계를 일종의 순간포

착을 통해 파악하더라도 도그마틱 규칙들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특정한 시점 T1에서도 도그마틱의 규칙체계는 모든 중요한

쟁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주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납득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법학의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법률문제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정당한 대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

니라, 다수의 납득가능한 대답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법학

자로서 법학 시험 답안지를 채점할 때에는 관용의 원칙을 견지해야 할 의무

가 있다. 즉 판례와 법학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 내에서 실제

로 주장되고 있는 견해를 답안으로 썼다면 그것이 설령 채점자의 견해에 반

할지라도 납득가능하고, 따라서 인정할 수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러한 관용원칙을 법실무에까지 적용한다면, 어떤 판결이 판례와 문헌에서 주

장되는 입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근거할 수만 있다면 그 판결은 어쨌든 납

득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학 답안지를 채점할 때 필수적인 관용원칙을 법실무에까지 적용

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관용원칙은 법관의 활동의 준칙이 될 수 없

다. 왜냐하면 이 원칙은 사법부의 제도적 전제조건과 합치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판결을 내리는 법관의 관점과도 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략적으로

표현하자면, 관용원칙은 법관의 활동과 법학의 활동을 고찰하는 법학, 특히 법

이론의 ‘외재적’ 관점을 대표한다. 이에 반해 사법시스템 그리고 판결을 내리

는 법관의 ‘내재적’ 관점에서는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

존재한다는 것을―반사실적으로(kontrafaktisch)!―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의 제도적 전제조건과 관련해서는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라는 이

념에 대한 구속이 심급제도로부터 도출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어

떤 재판부의 판결이 상급심에서 파기된다면 이는 사법시스템의 제도적 논리

에 비추어 볼 때 하급심의 납득가능한 판결이 상급심의 납득가능한 판결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심 판결이 오류라고 거

부되는 것이고 그래서 파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된 소송법 규정

은 이 점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예컨대 독일 형사소송법 제337조 제1항은


13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17

“판결이 법률위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상고이유가 될 수 있다”는 규

정을 통해 이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상고심은 모든 법률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고, 그 때문에 사법시스템의 논리에 비추어 볼 때 모든

법률문제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결정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결정을 내릴 때 (단순히 납득가능한 결정이 아니라) 정당한 결

정을 찾아야 한다고 전제해야만 하는 법관의 관점에도 부합한다. 설령 법관

자신은 법도그마틱의 기준에 따를 경우 충분히 여러 가지 판결이 가능하고

각 결정에 대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을지라

도 법관은 자신의 관점에서 최상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유일하

게 정당한 결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납득

가능한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를 그저 우연의 원칙에 따라 선택하는

법관은 법관이라는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판결을 내리도록 결정해야

한다는 요청은 결코 과도한 심리적 부담을 뜻하지 않는다. 똑같은 크기의 건초

더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 죽고 마는 부리단의 당나귀(Buridans

Esel)는 이념사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그저 궤변일 뿐이다. 법관은 자신의 관

점에서 최상의 근거를 가진 판결을 선택하여 결정해야만 하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법실무에 대한 제도적 관점은 로날드 드워킨의 유일하게 정당한 대

답이라는 테제(one-right-answer-thesis)와 합치한다. 나는 다른 많은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드워킨의 이 입장을 하나의 법이론적 입장으로서는 타당하지 않

다는 비판을 여러 번에 걸쳐 개진한 적이 있고, 재작년에 여기 고려대학교에

서 행한 강연1)에서도 드워킨에 대한 비판을 소개했었다. 따라서 드워킨에 대

한 비판을 오늘 여기서 반복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나의 비판의 결론만을

언급하겠다. 즉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라는 테제는 하나의 법이론적 입장으

로 방어할 수는 없지만, 법관의 관점에는 부합하고, 이 점에서 법관의 결정에

1) 울프리드 노이만(윤재왕 옮김), 법, 진리, 권위, 법철학연구 제16권 제2호(2013), 317-334면(327면 이하) 참고.


14페이지

218 법철학연구

관한 실천적 원칙으로 규정할 수는 있다.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라는 사고를 법관의 활동에 관한 실천적 원칙으로

이해한다면 이 사고는 이론적 타당성이 아니라, 그 실천적 결과에 비추어 판

단해야 한다. 나는 앞서 언급한 재작년의 강연을 포함하여 여러 번에 걸쳐

이러한 사고가 독일의 법도그마틱에서 국민의 법적 지위를 축소하는 방향으

로 이용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법치국

가적으로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라는 이념에 지향된 판결이 오히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그 증거로 연방헌법재판소의 한 판결을 원용할 수 있

다. 이 판결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즉 독일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당사자의

기본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수사처분 명령은 원칙적으로 법관만이 내릴 수

있다. 예컨대 주거수색이나 전화감청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형사소송법

은 법관의 결정을 기다릴 때에는 수사처분의 성공이 불확실할 정도로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이 ‘법관유보’의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검찰 또

는 심지어 경찰이 ‘긴급권한’을 갖고서 해당하는 수사처분을 명령할 수 있다.

구체적 상황에서 그와 같은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결

정은 일단 ‘긴급권한’을 주장하는 관할 관청만이 내릴 수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처분의 대상이 되었던 국민의 관점에서 볼 때 관할 관청이

불법적으로 ‘긴급을 요하는 경우’가 존재한다고 인정했고 이를 통해 법관유보

를 회피했다면 과연 국민은 사후적인 권리보호를 획득할 수 있는지 여부 및

그 범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이 물음과 관련하여 독일 법원의 판례는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제한

적인 입장을 취했다. 즉 ‘긴급을 요하는 경우’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서는 담당 공무원이 의무재량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법원의 사후적 심사는 공무원의 자의에 대한 통제(Willkürkontrolle)에 국한된

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1년의 연방헌법재판소 판결을 통해 이 문제와 관련

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이 판결에 따르면 ‘긴급을 요하는 경우’라는

개념의 해석과 적용은 무제한적으로 법원의 통제 하에 있다고 한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이 판결은 법이론 문헌에서 곧장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


15페이지

실증주의 이후 시대의 법률과 판결 219

이라는 법철학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보기에도 이는

문제의 판결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왜냐하면 연방헌법재판소는 법원의 심

사가 행정에 대한 실체법적 구속을 넘어서서까지 확장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곧 다음과 같은 점을 뜻한

다. 즉 행정에 의한 기본권침해에 대한 완벽한 심사라는 연방헌법재판소가

제기한 요청은 필연적으로 행정적 결정이 법률을 통해 완벽하게 규정된다는

모델에 상응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와 관련해서는 단 하나의 결정만

이 납득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형사소추기관에게는 판단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는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라는 모델에 해당한다.

지금까지의 서술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법률에 합치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결정’이라는 사고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는 엄격한 법

률구속의 가능성은 실증주의 이후의 시대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

로 단순한 허구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고가 갖고 있는 실천적 역량

의 측면에서는 이 사고를 이론적 타당성이 아니라, 법치국가적 역량에 비추

어 판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엄격한 법률구속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규범

적 물음은 각 법체계의 규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법이론 자체는 이 물음에

대해 보편적 구속력을 갖는 답을 줄 수 없다.

이 점은 오늘 강연을 마치면서 짧게 다루고자 하는, 법관의 법형성에도 해

당된다. 법률의 해석과 법관의 법형성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설정할 수 있는

지는 법이론에서 상당히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내 생각으로는 양자 사이에

는 양적 차이가 있을 뿐, 질적 차이는 없다. 다시 말해 해석과 법형성 사이의

경계는 법원이 양자 사이에 설정한 경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법원은 이

와 관련된 자신의 견해에 대해 근거를 제시해야 하고, 그러한 근거를 제시할

때에는 예컨대 ‘문언의 한계’와 같은 승인된 기준을 원용해야 한다. 따라서 궁

극적으로 해석과 법형성의 경계는 이 문제를 관할하는 법원, 독일의 경우에

는 통상 연방헌법재판소가 결정할 문제이다.

내가 신봉하는 제도적 접근방법에 따른다면 명백히 법관의 법형성에 해당

하는 판결의 허용 여부에 대한 결정은 각 법체계의 재량에 맡기게 되고, 이는


16페이지

220 법철학연구

포용적 법실증주의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독일의 경우 이 결정은 법률로

인정되고 있다. 즉 법원조직법(GVG) 제132조 제4항은 명시적으로 연방법원에

게 ‘법의 지속적 형성(Rechtsfortbildung)’이라는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연방헌

법재판소도 일반 법원의 법형성 권한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실무에서 ‘법관

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독일의 집단적 노동법

에서는 연방노동법원(BAG)의 판결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허용되는 법형성의 한계가 어디에서 설정되는가는 법이론적 문제보다는

헌법적 문제로 논의되고 있다. 물론 연방헌법재판소는 가끔씩 법학방법론의

기준을 원용하여 법형성이 승인된 법적용 방법의 범위를 준수하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판례변경의 법치국가적

의미가 핵심적인 기준으로 원용된다. 그 때문에 연방헌법재판소는 다수의 결

정에서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법형성을 거부한 바

있다. 특히 판례변경이 기본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불리

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법형성의 허용 여부를 구별한다. 이는 앞

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결정’이라는 논증형태와 관련하여 전개했던 기준과 정

확히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법관의 법률구속이라

는 문제는 실증주의 이후의 시대에는 더 이상 법이론과 법학방법론이 지배하

는 영역이 아니다. 이 문제는 각 법질서의 제도적 형성이 관할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무엇보다 각각의 결과의 법치국가적 성질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다. 법치국가적 성질에 대한 평가는 법윤리학적 문제이고, 따라서 다시

법철학의 관할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법철학은 국가법학과 헌법학

과 같은 다른 분과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