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6.25 전시하의 행정법 -전쟁과 법치주의-, 2000 행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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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제〉
6․25 戰時下의 行政法 - 戰爭과 法治主義 -
朴 正 勳
*
85)
Ⅰ. 序說
6․25 전쟁1)이 일어난 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겨우 2년만의 일이기 때문에,
이제 막 법치주의적 기초를 정립하기 시작한 단계에서 들이닥친 戰亂에 대해 법치
주의 관점에서 당시의 법제도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작업으로 치부될
우려도 없지 않다. 더욱이 종래 「戰爭과 法」이라는 주제 아래 논의되어 온 문제들
은 대부분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국제법적인 관심사로서, 戰時下의 국내의 공
법적 질서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開戰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3년여의 기간은 동시에 우리나라의 토대 형성
기로서, 우리나라 정치, 사회,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2), 법제도와 법문화의 정립에도
실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6․25 전쟁에 관한 기억과 망
각이 정치적 관점에서 타율적으로 결정되는 소위 “기억의 정치화” 과정을 통해 開
戰의 책임 여부를 중심으로 “우리편의 정당성”과 전쟁피해만을 상기해 온 것도 사
*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助敎授 1) 본 연구를 위한 법령조사는 金泰昊 법학석사(육군사관학교 전임강사,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재학중)의 도움에 힘입은 바 컸음을 밝힌다. 6․25 전쟁에 관 한 역사적 사실과 문헌은 和田春樹, 韓國戰爭, 창작과 비평사, 1999; 김학준, 한국전쟁 에 대한 국내외의 문헌, 외교 5, 1988.3. 120-125면; 온창일, 한국전쟁에 관한 문헌일람, 육사논문집 참조. 2) 이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다룬 사회과학적 문헌으로, 유석춘, 한국전쟁과 남한사 회의 구조화, 한국과 국제정치 12, 경남대학교 1990.9. 71-93면; 전철환, 한국전쟁과 남 한경제의 재편성 ― 한국전쟁과 쿠데타의 재조명, 광장 202, 1991.7. 96-121면; 유재일, 한국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정착 ― 분단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의 정치경제학, 역사비평 16, 1992.2. 139-150면; 서주석, 한국전쟁과 이승만 정권의 권력 강화, 역사비 평 9(6․25 40주년특집), 1990.5. 134-148면; 유재갑, 한국전쟁과 한미관계의 성격 ― 전 쟁의 원인, 과정, 결과에 비추어 본 양국관계의 역사적 성격, 한국과 국제정치 6, 경남 대학교 1987.9. 139-177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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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이다.3) 하지만 이제 새천년 새로운 시대에 6․25 전쟁 50주년을 맞이하면서, 관
심의 대상을 우리나라 법치주의의 정립과 행정법의 구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를 검토하고, 나아가 - 「전쟁과 법치주의」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
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것은 자못 의의가 큰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국가방위를 위한 전쟁이 중요한 국가임무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전쟁
수행을 위한 이른바 戰時動員體制 또한 국가의 중요한 行政體制임은 분명하고, 그
렇다면 그 체제는 국가행정의 기능과 운영을 법적으로 담보하고 규율하는 行政法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전쟁은 법제도(Rechtseinrichtung)의 하나이다”4)라고
갈파한 슈탐믈러의 말은 국제법 차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한
계상황 하에서는 법치주의 자체가 존립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지만, 오히려 그러한
한계상황 하에서 법치주의의 의의와 기능은 분명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본고에서는 먼저 당시의 행정법적 규율 상황을 개관한
다음(Ⅱ), 전쟁에 대하여 법치주의가 갖는 의미와 요청을 검토하여(Ⅲ), 그 검토결
과에 의거하여 6․25 전쟁에 대한 행정법적 평가를 시도하고(Ⅳ), 마지막으로 현재
의 과제를 제시하기로 한다(Ⅴ).
Ⅱ. 6․25 戰時下에서의 行政法的 規律狀況
행정법의 규율대상은 크게 행정조직과 행정작용, 그리고 행정구제로 나뉘어진다.
따라서 -논의의 편의상- 6․25 전시하의 행정법적 규율상황을 이 세 가지 측면
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 行政組織
(1) 中央行政組織
1948.7.17. 공포된 제헌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국회의 간접선거(제53조)에
서 선출되는 대통령은 행정권의 수반으로서(제51조), 國軍을 統帥하고(제61조 제1
항), 헌법과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해 공무원을 임면한다(제62조). 현재의 국무회의
에 상응하는 國務院은 대통령과 대통령이 -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
임명하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로 구성되는데(제68조, 제69조), 국가의 중요정책에
관해 議決權을 갖고 있었다(제72조). 그 중 본고의 주제와 관련있는 것은 宣戰․講
3) 강인철,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 한국전쟁 50주년에 즈음하여, 창작과 비평 108, 2000년 여름호, 343면 참조. 4) Rudolf Stammler, Rechtsphilosophie. 3.Aufl., Berlin/ Leipzig 1928, S.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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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2호), 戒嚴案․解嚴案(6호), 軍事에 관한 사항(7호) 등이다. 行政各部의 長官은
국무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고(제73조), 行政各部의 조직과 직무범위는 법률로
서 정하도록 하였다(제75조).
위 제헌헌법 제75조에 의거하여 1948.7.17. 헌법공포와 동시에 법률 제1호로 정부
조직법이 공포․시행되었는데,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재무부, 법무부, 문교부, 농
림부, 상공부, 사회부, 보건부, 교통부, 체신부 12개부가 설치되었고(제14조), 국무총
리 소속기관으로서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및 기획처가 설치되었다(제30조).5)
경찰조직은 1948년 정부수립 당시 내무부장관의 보조기관인 「內務部 治安局」의
형태로 운영됨으로써 독립된 조직을 갖지 못하였다. [1974.12.24. 그 명칭이 「內務部
治安本部로 개칭되었다가 1991.7.31. 법률 제4369호 경찰법의 시행에 따라 내무부장
관 소속의 독립행정기관으로 경찰청이 발족하였다.]
(2) 軍事組織
1948.11.30. 법률 제9호로 제정된 국군조직법은 국군을 육군과 해군으로 조직하
고,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직속기관으로 最高國防委員會, 國防資源管理委員會 및
軍事參議院을 설치하였다. 軍政과 軍令을 통합하여6) 국방부장관은 軍政 이외에 軍
令에 관해서도 대통령이 부여하는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국방부에 대통령과 국
방부장관의 지시를 받는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을 두고 그 밑에 육군본부와 해군본부
를 설치하여 각각 육군총참모장과 해군총참모장을 두었다.7) 그후 1949.5.5. 대통령
령 제58호 「海兵隊令」에 의해 해병대가 발족하고, 1949.10.1. 대통령령 제254호 「空
軍本部令」에 의해 그 동안 육군에 속해 있던 航空隊가 공군으로 독립하였다.8)
5) 특기할 만한 것은 정부조직법이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제2장(국무원과 국무총 리), 제3장(행정각부), 제4장(국무총리 소속기관) 다음에 - “감찰위원회”를 규정하는 제6장보다 앞서 - 제5장에서 “공무원자격의 고시와 전형을 행하는” 대통령직속기관으 로서 “考試委員會”에 관해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6) 軍政과 軍令을 분리하는 兵政分離主義는 軍令을 일반행정부의 소관에서 제외하여 국가 원수 직속으로 별도로 독립된 군령기관을 둠으로써 軍令을 국가행정의 범위 밖에 두는 제도로서, 제정독일이나 제정러시아 또는 일제와 같은 군국주의국가에서 채택되었다. 이에 반해 兵政統合主義는 군령기관과 군정기관을 모두 행정부에 소속시킴으로써 軍令 도 軍政과 같이 국가행정의 일부로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정치적 통제 아래 수행되도 록 하는 제도로서, 미국․영국 등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되고 있다(金道昶, 일 반행정법론(下), 청운사, 1993, 731면 참조). 6․25 전쟁 당시 국방부장관이 軍令을 대통 령이 부여하는 직무에 한해 담당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兵政統合主義는 아니지만, 상술 한 바와 같이, 제헌헌법 제72조 제7호에서 군사에 관한 중요사항을 國務院의 의결사항 으로 있었던 이상 본질적으로 兵政統合主義이었음이 분명하다. 7) 법제처, 大韓民國 法制五十年史(上), 1999, 754면 참조. 8) 공군본부 법무감실, 空軍法務 五十年史(1949-1999), 1999, 6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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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地方行政組織
제헌헌법은 지방자치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는데(제96조, 제97조)9), 1948.11.17.
법률 제8호로 限時法인 地方行政에관한臨時措置法이 제정되어 현재와 유사한 지방
행정단위가 설치되었으나 이는 지방행정조직에 불과하였고, 정식의 지방자치제도는
1949.7.4. 법률 제32호로 제정(1949.8.15. 시행)된 地方自治法에 의해 마련되었다. 동
법에 의하면,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는 道․서울특별시․市․邑․面으로서, 각 지방자
치단체에 지방의회를 두며, 道知事․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市․邑․面
長은 지방의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지방의회의원 선거는 6․25
전시하인 1952년 비로소 서울․경기․강원을 제외한 지역에서 실시되었으며 그때까
지 市․邑․面長은 道知事에 의해 임명되었다.
(4) 小結
신생 대한민국은 위와 같은 - 형식적으로는 거의 완비된 - 행정조직을 갖고
1950년 6․25 전쟁을 맞았으며, 전쟁 중에도 비상계엄에 의해 행정권한의 상당부분
이 계엄사령관에게 이관되거나 계엄사령관의 감독을 받게 되었지만 행정조직의 형
식적 편성은 변함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히려 1952년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지방의회의원 선거까지 실시되었다. 다만 1952.7.4. 소위 拔萃改憲인 제1차 헌법개
정에 의해 대통령이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도록 바뀌었을 뿐이다.10)
- 行政作用
6․25 전시하의 행정작용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비상계엄과 대통령의 긴
급명령이었다. 따라서 아래에서 먼저 비상계엄과 대통령 긴급명령을 살펴본 다음,
중요한 행정작용영역으로서 군사사법행정, 전시동원행정, 재무․경제행정, 경찰 및
9) 제헌헌법 제96조 제1항은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 내에서 그 자치에 관한 행정사 무와 국가가 위임한 행정사무를 처리하며 재산을 관리한다”, 제2항은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 내에서 자치에 관한 規程을 제정할 수 있다”, 제97조 제2항은 “지방자치단 체에는 각각 의회를 둔다”고 규정하였다. 10)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실시된 제2회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 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제헌헌법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再選 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여당은 - 대통령의 직접선거제와 국회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政府案과 의원내각제를 내용으로 하는 國會案을 절충한 - 소위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국회의원 통근버스의 강제연행, 10명의 국회의원 체포, 국회해산의 위협 등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1952.7.4. 통과시킨다. 이 개정헌법에 의거하여 실시된 1952.8.5.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韓泰淵 외, 韓國憲法史(上),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427-433면; 金哲洙, 憲法改正, 回顧와 展望, 대학출판사, 1986, p.76-78 참조). 이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정착하는 데 부닥친 첫 번째 커다란 시련이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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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질서행정, 복지․사회행정에 대한 법적 규율상황을 개관하기로 한다.
(1) 非常戒嚴
제헌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
정하였을 뿐 계엄선포의 요건과 효과 및 절차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았다. 1949.11.24. 법률 제69호로 제정된 계엄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① 계엄을 警備戒嚴과 非常戒嚴으로 구분하고,
② 원칙적으로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되, 교통․통신의 두절로 인해 대통령의 계엄선포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는 당해 지방을 관할하는 군사책임자가 임시로 계엄을 선포하
고 대통령의 사후 추인을 얻도록 하였으며,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 또는 추인한 때에는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한다.
③ 계엄사령관은 국방부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되, 전국이 계엄지역으로 된 경우에는 대통
령의 지휘․감독을 받고, 경비계엄이 선포된 경우에는 계엄지역 내의 軍事에 관한 行政
및 司法事務를, 비상계엄이 선포된 경우에는 계엄지역 내의 모든 行政事務와 司法事務
를 관장한다.
④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 내에서 군사상 필요한 경우 체포․구금․압수․수색․거주․이
전․언론․출판․집회 기타 집단행동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고, 일정한 죄
를 범한 자에 대하여는 군법회의에서 재판한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2주 후인 1950.7.8. 이승만 대통령은 위 계엄법에 의거하
여 전라남북도를 제외한 남한 전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총
참모장 육군소장 정일권을 임명하였다.12) 그후 전세의 변화에 따라 부분적으로 비
상계엄이 해제 또는 경비계엄으로 변경되기도 하고 또 지역에 따라 다시 선포․해
제가 반복되다가 1952.4. 일단 계엄이 완전히 해제되었다.13) 그러나 1952.5.25. 이승
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파동 차원에서 전라남북도의 일부, 경상남도
의 일부 및 임시수도 부산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육
군소장 원용덕을 임명하였다. 이는 그후 1980년까지 우리나라에서 계엄령이 빈번히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게 된 시발점이라고 할 것이다. 1952.7.4. 발췌개헌이 성공
하자 같은 달 28. 비상계엄이 해제되었고, 그후 휴전까지 다시 계엄은 선포되지 않
았다.14)
11) 위 大韓民國 法制五十年史, 824면; 吳炳憲, 계엄법의 기원과 문제점, 사법행정 397, 1994.1. 58-65면 참조. 12) 1952.1.28. 대통령령 제598호로 제정된 계엄법시행령 제2조에 의하면, 대통령령 계엄사 령관은 현역 將官 중에서 국방부장관이 上申한 자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현행 계엄법 제5조 제1항의 규정과 동일하다. 13) 그때까지 국무원의 계엄선포에 관한 의결․공고가 비상계엄에 관해 6건, 경비계엄에 관해 4건이 있었다(金道昶, 국가긴급권론, 청운사, 1968, 22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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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엄법은 일본의 계엄령을 모방한 것으로서, 계엄사령관의 조치에 응하지
않은 경우의 처벌 문제, 내란에 관한 죄의 처리 방법, 계엄선포로 인하여 법원의 권
한에 가해지는 제한의 범위에 대해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는 등 불명확한 내용이
많았다. 특히 계엄사령관의 행정사무와 사법사무에 대한 관장의 구체적 의미, 체
포․구금․수색 등에 대한 특별한 조치의 구체적 범위 등에 관해 명확한 기준이
전혀 없는 채로 계엄이 시행됨으로써 계엄사령관에게 행정사무와 사법사무에 관한
광범위한 권한이 주어졌다.15)
이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은 대법원이 1953.6.10. 체포․구금․수색 등에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당시 계엄법 제13조가 영장제도를 규정한 헌
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헌법위원회에 위헌제청하고, 이에 대하여 헌법위원회는
1953.10.8. 4286 憲委 제2호 결정에서 계엄법이 체포․구금․수색 등에 특별한 조치
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헌법의 범위 내에서 이를 제한한다는 취지이고 법관
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합헌결
정을 하였다는 점이다.16)
(2) 大統領의 緊急命令․緊急財政處分
제헌헌법 제57조 제1항은 “내우, 외환, 천재, 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際하여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대통령은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경우에 한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하거나 또는 재정상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대통령
에게 긴급명령제정권 및 긴급재정처분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급명령과 긴
급재정처분은 지체없이 국회에 보고하여 승인을 얻어야 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그때부터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 대통령은 지체없이 그 사실을 공포하여야
한다(제57조 제2항). 이승만 대통령은 6․25 개전당일 非常事態下의犯罪處罰에관한
特別措置令을 필두로 전쟁기간 동안 모두 13개의 대통령긴급명령과 1개의 재정긴급
처분을 발하였는데, 2개의 긴급명령만이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그 주요내용
은 다음과 같다.17)
① 1950.6․25. 대통령긴급명령 제1호 非常事態下의犯罪處罰에관한特別措置令: 살인 등
강력범죄, 군사방해행위, 도주원조 등(이상 사형), 강도․공갈․절도 기타 질서문란
14) 吳炳憲, 위의 논문, 62-63면; 金敎植, 광복20년 16 ― 계엄선포와 파병거부, 동양방송, 1976, 241-255면. 15) 오호택, 위의 논문, 62면 참조. 16) 金哲洙, 違憲法律審査制度論, 학연사, 1983, 169-171면 참조. 17) 위 大韓民國 法制五十年史, 2262-226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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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공무집행방해, 이적행위(이상 사형, 무기, 10년 이상의 무기징역)에 대한 형량
을 가중하고, 재판을 단독판사의 단심으로 하며, 판결에서 증거설명을 생략할 수 있
는 등 형사처벌절차를 간소화하였다.18)
② 1950.6.28. 대통령긴급명령 제2호 金融機關預金等支拂에관한特別措置令: 예금 기타 자금
의 지불을 재무부장관 등의 승인을 얻도록 하였다.
③ 1950.7.7. 대통령재정긴급처분 제1호: 전쟁수행에 필요한 경비로 일정한 금액을 1950년
도 예산정액을 초과하여 지출하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④ 1950.7.16. 대통령긴급명령 제3호 鐵道運送貨物特別措置令: 철도로 수송 중인 화물을 下
積․移積 또는 收用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⑤ 1950.7.19. 대통령긴급명령 제4호 金融機關預金代拂에관한特別措置令: 금융기관이 피난
민을 위하여 예금을 대불하는 특별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⑥ 1950.7.26. 대통령긴급명령 제5호 戒嚴下軍事裁判에관한特別措置令: 군사재판의 절차를
간소화하고 판사․검사가 군법무관․군검찰관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⑦ 1950.7.26. 대통령긴급명령 제6호 徵發에관한特別措置令: 군작전에 필요한 군수물자, 시
설 또는 인적자원을 징발․징용하기 위한 것이다.
⑧ 1950.7.22. 대통령긴급명령 제7호 非常時鄕土防衛令: 만14세 이상의 국민에 대하여 향토
방위의 의무를 부과하고, 부락단위로 自衛隊를 조직하여 향토방위와 防犯을 맡도록 하
였다.
⑨ 1950.7.22. 대통령긴급명령 제8호 非常時警察官特別懲戒令: 경찰관의 징계에 관한 특별
규정을 두었다.
⑩ 1950. 8.4. 대통령긴급명령 제9호 非常時鄕土防衛令: 이는 위 대통령긴급명령 제7호가
1950.8.1.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자 그와 유사한 내용으로 다시 제정․공포한 것이다.
⑪ 1950.8.28. 대통령긴급명령 제10호 朝鮮銀行券의流通및交換에관한件: 조선은행권의 유통
을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게 하고, 이 경우에는 조선은행권은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
도록 하였다.
⑫ 1950.12.1. 대통령긴급명령 제11호 地稅에관한臨時措置令: 地稅의 과세표준, 세율, 징수
방법 등에 관해 地稅法(1950.12.1. 법률 제155호)에 대한 특례를 규정한 것이었는데,
1950.12.13.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여 1951.1.18. 국회의 승인을 얻지 못해 실효되었음
이 공포되었다.
⑬ 1952.10.4. 대통령긴급명령 제12호 捕獲審判令: 포획사건을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에 의해 심판하는 포획심판소의 구성․관할․심급․심판절차 등을 규정하였다.
⑭ 1953.2.15.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 通貨에관한特別措置令: 화폐단위를 圜으로 하고 이에
따르는 거래 기타 제반조치를 규정한 것이다.
18)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19-2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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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軍事司法行政
군사사법행정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행정법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비상계엄
하에서 민간인도 많은 경우에 군사재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되는 범
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제헌헌법이 발효하기 이전인 1948.7.5. 미국 육군형법을 본뜬 國防警備法과 海岸
警備法이 제정․공포(1948.8.4. 시행)되었는데19), 이는 1962.1.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되기 이전까지 군사범죄에 대한 실체법
적 규율과 군법회의 재판에 대한 소송법적 규율을 담당하였었다. 국방경비법은 육
군(조선경비대)에 적용되고 해안경비법은 해군(해안경비대)에 적용되는 것으로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였다. 다만 국방경비법은 지휘관에 대한 징계처분의 근거, 유형,
절차에 관한 규정(제102조)을 두고 있었는 데 반해, 해안경비법은 그러한 규정은
없고 함정지휘관의 즉결처분권을 규정하고 있었다(제71조). 공군(1949.10.1. 설치)에
대해서는 1950.1.21. 국방부훈령 제6호 空軍刑事法臨時措置에관한暫定規程에 따라
국방경비법이 적용되었다.
국방경비법은 군법회의 재판권에 관해 고등군법회의, 특설군법회의 및 약식군법
회의를 두고 있었으나, 이는 범죄의 경중에 따른 사물관할로서, 상소제도가 없었고,
대법원에의 上告에 관한 규정도 없었다. 특히 제헌헌법이 군법회의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아니하여 군법회의 제도의 위헌성이 문제되었는데, 그 후 1954.11.29. 제
2차 개헌에 의해 헌법 제83조의 2에서 “군사재판을 관할하기 위하여 군법회의를 둘
수 있다. 단 법률이 정하는 재판사항의 상고심은 대법원에서 관할한다(제1항). 군법
회의의 조직, 권한과 심판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제2항)”라고 규정하기에 이른
다.
1950.7.8.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중앙계엄고등군법회의와 경남계엄고등군법회의가
설치되고 각 도 단위로 계엄민사부가 설치되어 후방 민간의 형사사법을 담당하였
다. 검찰관과 군법회의의 법무사는 법무장교로 임명하게 되었는데, 법무장교의 자격
이 판․검사와 동일하였기 때문에 그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20) 그리하여 위에서
본 1950.7.26. 대통령긴급명령 제5호 戒嚴下軍事裁判에관한特別措置令은 각 군법회
의 설치장관이 민간의 판사․검사로 하여금 법무사․검찰관의 직무를 행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950.12.7. 법률 제170호 判事및檢事特別任用試驗法과
1952.4.24. 법률 제243호 軍法務官任用法이 제정되어 부족한 인력을 충원하였다.
19) 공포일이 제헌헌법 발효일 이전이기 때문에 제헌헌법 제100조 소정의 “현행법령”에 해 당되어 효력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1948.7.17. 공포․시행된 정부조직법이 법률 제1호 이고, 국방경비법은 법률번호도 없다. 20) 육군본부 편찬, 6․25사변 後方戰史(인사편), 1955, 3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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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형사사건에 관해 일반법원과 군법회의의 재판권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많
아지게 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1.7.29. 법률 제210호로 軍法會議의裁判
權에관한法律이 제정되었는데, 동법에 의하면, 일반법원과 군사법원 사이에 발생된
재판권에 대한 쟁의에 대하여는 대법원이 裁定하고, 대법원의 裁定이 끝날 때까지
일반법원 또는 군법회의에 계속 중인 사건은 정지되었다.
(4) 戰時動員行政
1) 兵力動員
1949.1.20. 대통령령 제52호로 兵役臨時措置令이 시행되었으나 이는 지원입대에
관한 것으로서 병역법 제정시까지 유효한 限時法이었다. 그후 1949.8.6. 법률 제41
호로 제정된 병역법은 만20세에 달한 남자에 대한 國民皆兵制를 채택하였다. 동법
에 의한 兵役은 크게 常備兵役, 護國兵役, 後備役, 補充兵役, 國民兵役으로 나뉘는
데, 상비병역 중 현역의 복무연한은 육군 2년, 해군 3년이었고, 현역 또는 호국병역
을 필한 자는 예비병역으로서 그 복무연한은 육군 6년, 해군 5년이었다.
병역법이 시행되고 1년도 되지 못한 기간 중에 징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6․25 전쟁을 맞았다. 그리하여 上記한 1950.7.22. 대통령긴급명령 제7호
및 1950.8.4. 대통령긴급명령 제9호 非常時鄕土防衛令에 의해 만14세 이상의 남자에
게 향토방위의 의무를 부과하는 동시에, 1950.9. 중순부터 각 도에 각 地區兵事區司
令部를 설치하여 “제2국민병”을 가두모집, 가택수색 등을 통해 징집하였으나, 1950
년말까지 등록된 제2국민병은 약 230만명으로서, 6․25 발발 직전 병역 해당자 약
470만명의 절반에 불과하였다.21)
이와 같이 병력동원에 차질이 생기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950.12.21. 법률 제
172호로 國民防衛軍設置法이 제정되었다.22) 동법의 목적은 “국민개병의 취지를 昻
揚시키는 동시에 전시 또는 사변에 있어서 병력동원의 신속을 기하려는 것”으로서,
만17세 이상 40세 이하인 남자는 지원에 의하여 국민방위군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고(제2조), 전시․사변에 군작전상 필요한 때에는 병역법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소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5조).23) 그러나 동법의 시행
은 소위 “국민방위군사건”이란 오명을 남기고 실패로 돌아갔다. 1951년 1.4 후퇴시
국민방위군 간부가 국고금과 보급품을 부정 착복하고, 국민방위군 중 수천명이 餓
21) 육군본부, 6․25사변 後方戰史(인사편), 1956, 49면; 徐鏞宣 외, 한국전쟁연구 - 점령정 책․노무운용․동원, 국방군사연구소, 1995, 241면 참조. 22)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에 대하여 국회본회의는 국민방위군이 여타의 정치운동, 청년운 동 및 일반치안에 관여할 수 없도록 방지하기 위한 규정과 附則에서 기존의 청년방위 대 등 군사유사단체를 해체하도록 하는 규정을 추가하여 의결하였다. 23) 동법의 세부 내용은 국회 입법정보 사이트 http://na6500.assembly.go.kr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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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 凍死, 病死하고 수만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결국 동법은 1951.5.12. 법률 제195
호로 폐지되고(같은날 법률 196호로 비상시향토방위령(대통령긴급명령 제9호)도 폐
지되었음)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었다.24)
그 후 1951.5.25. 법률 제203호로 병역법이 개정되어 병력소집공고제가 채택되었
는데, 이는 병력을 소집할 때에는 미리 소집대상자의 병종, 연령 및 소집기간 등을
공고하여 해당자가 그 내용을 사전에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951.8.25. 병력동
원을 전담하는 병무국이 설치되어 1952.2.부터 같은 해 10.까지 제2국민병 대상자로
서 만19세 이상 만28세 이하 전원에 대한 징병검사를 실시하고, 1952.9.부터 처음으
로 병역법에 의한 정상적인 징집이 실시됨으로써 병력동원제도가 차츰 확립되었
다.25)
2) 勤勞動員
6․25 전쟁 중 병력의 부족 때문에 노무자의 전투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26) 전쟁 이전에 노무동원에 관한 법령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개전초기에는 自願
에 의한 “保國隊”와 각 부대가 임의로 동원한 인력밖에 없었다. 이에 1950.7.26. 上
記한 대통령긴급명령 제6호로 徵發에관한特別措置令이 시행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징발관(국방부 제1국장, 특명사령관, 육․해․공군총참모장, 군단장, 사단장, 위수사
령관 등)이 징용영장에 의해 인력을 강제동원할 수 있고(제2조 내지 제7조), 징용에
응하지 아니하거나 징용대상자를 은닉하는 자 또는 이를 교사․방조한 자는 2년 이
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였다(제15조).27) 같은 날 국방부령(임시) 제1호
徵發에관한特別措置令施行規則이 제정되어 징용을 실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후
上記한 1950.8.4. 대통령긴급명령 제9호 非常時鄕土防衛令 및 1950.12.21. 법률 제172
24) 역사문제연구소(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1993, 22-25면 참조. 이 사건에 관해 5.16 이후 군사정권에 편찬된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방위군의 간부들은 多額의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하는 동시에 이것을 은 폐하기 위하여 당시의 행정기관, 감찰위원회, 일부국회의원들에게까지 증뢰하였다는 것 이다. 이로 인해 후퇴장정의 식량 의료 기타보급품이 부족하여 수백명의 사망자와 수 만명의 병자를 내게 되었다. … 모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귀환장정의 80퍼센트는 努力 不能할 것이라 하며, 20퍼센트는 生命保持가 불가능할 것이라 한다. … (엄청난 피해를 남긴 이 사건에서) 이승만정부는 천수백명의 억울한 장정의 희생에 대한 대가로 겨우 방위군 고관 5명을 死刑에 처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지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은 행정부 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입법부를 억압하여 독재정권을 확립하기 위해 혈안이 된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제1집, 1962, 16-19면). 25) 위 한국전쟁연구 ― 점령정책․노무운용․동원, 242-243면 참조. 26) 위 한국전쟁연구 ― 점령정책․노무운용․동원, 136면 참조. 27) 이 대통령긴급명령으로 제정된 징발에관한특별조치령은 1963.5.1. 법률 제1336호로 징 발법이 제정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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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 國民防衛軍設置法에 의해 소집된 병력 중의 상당부분이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피징용자에 대한 대우는 1950.8.21. 대통령령 제381호로 제정된 徵發補償令 및 같
은 날 국방부령(임시) 제3호로 제정된 被徵用者報酬規程에 의해 규정되었다. 위 징
발보상령에 의하면, 피징용자에게 보수를 지급하되 그 금액은 일반노동임금에 준하
여 補償査定委員會의 査定에 따라 국방부령으로써 정하고(제6조)28), 피징용자가 戰
死 또는 공무수행 중 사망한 경우에는 장의비, 조위금 및 유족에 대한 생활부조금
을 지급하며(제7조), 피징용자가 상해를 입은 경우에는 加療하거나 치료비를 지급하
고 신체적 장애에 대하여 생활부조금을 지급하는데(제8조), 이러한 보상청구권은 국
방부장관이 보상청구에 관해 공고한 날로부터 6월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하도록
되었다(제9조).29)
그 후 1951.6․25. 정부는 만17세 이상 만50세 미만의 남자 및 만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여자를 1년 중 60일 이내의 기간 동안 전시에 필요한 물자의 생산, 배
급, 운반, 도로의 개수 또는 전쟁으로 파괴된 복구사업에 동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
는 「戰時勤勞動員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국회는 이를 폐기하고 그 대신 동
원대상자를 만17세 이상 만50세 미만의 남자에 한정하고 근로동원을 업무의 종류
와 근로기간에 따라 1종, 2종, 3종으로 분류하는 代案을 제안하였다. 이 代案에 기
초하여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제2대 국회에 의해- 1953.6.3. 법률 제292호 戰時
勤勞動員法으로 제정되었다. 동법에 의하면, 동원대상은 만17세 이상 만40세 미만의
남자로서 이에 해당하는 자는 행정관청에 등록하여야 하고(제3조), 동원업무는 전쟁
완수 또는 전쟁으로 인한 재해를 복구함에 필요한 물자의 생산․수리․보관, 운
수․통신, 위생․구호, 토목․건축, 철도․도로․항만의 시설․개수에 관한 업무이
며(제2조), 동원의 종류는 단순노무로서 1년 중 60일 이내의 기간 동원되는 1종동
원, 전문적 기술업무로서 1년 중 6개월 이내의 기간 동원되는 2종동원 및 단순노무
로서 1년 중 20일 이내의 기간 단체 또는 개인을 동원하는 3종동원이 있다(제4조).
동원절차는 근로동원의 배치를 받고자 하는 자가 당해 업무를 소관하는 주무부장관
28) 위 국방부령(피징용자보수규정)에 의한 1950.8.21. 당시 노무자의 급여는 기술공은 일당 500원, 중노동자는 일당 450원, 경노동자는 일당 400원이고, 군에서 급식하는 자에게는 급식비로 일당에서 300원을 공제한 금액을 지급하였다. 이 보수규정은 그후 1951.3.2. 국방부령 제6호로 개정되었는데, 기술공은 일당 970원, 중노동자는 일당 830원, 경노동 자는 일당 770원으로 인상되었고 급식비 공제가 폐지되었다. 29) 이와 같이 징발에관한특별조치령에 의해 징용된 노무자들은 국군 1개대대에 각 50∼60 명씩 배정되어 활동하였고, 그후 1951.3. 유엔군에 의해 약 2만명의 「民間人運搬團」 (CTC: Civil Transportation Corps)이 조직되었다가 1951.7. 「勞務團」(KSC: Korean Service Corps)로 통합되었는데, 그 인원은 1951.9. 약 34,000명에서 점차 증가하여 휴 전시에는 약 90,000명에 이르게 되었다(위 한국전쟁연구 - 점령정책․노무운용․동원, 157-181면, 199-20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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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경유하여 사회부장관에게 신청하면(제5조), 사회부장관이 지방행정의 장에게 동
원명령을 발하고(제6조), 지방행정의 장은 동원영장을 발부하여 인력을 동원하는데
(제8조), 사회부장관은 근로동원을 신청한 자에게 근로조건 기타 피동원자의 관리에
관한 관리명령을 할 수 있다(제7조). 동법은 여비의 부담과 임금의 선불(제14조),
치료비와 위자료의 지급(제16조)에 관한 규정을 두고, 피동원자에게 출두의무(제10
조)와 근로장소 이탈금지의무(제12조)를 부과하고 그 위반시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하며(제19조), 근로동원을 신청한 자가 관리명령 또는 동원해제명령에 위
반한 때에는 6월 이하의 징역 또는 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였다(제20조).
특기할 만한 것은 피동원자가 동원된 직장에서 받는 임금이 종전의 직장에서 받은
임금에 미달할 때에 그 부족액을 종전의 사용자가 지급하도록 하도록 하였다는 점
이다(제17조 제2항).
위 전시근로동원법이 시행됨으로써 동법 부칙에 의해, 그 이전의 징발에관한특별
조치령 중 징용에 관한 부분이 실효되고(제26조), 위 특별조치령에 의해 징용된 자
중 단순노무에 종사하는 자는 동법에 의해 동원된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이러한
전시근로동원법은 휴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전쟁피해의 복구에 활용되었고, 그후
최근까지 그 내용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민방위기본법과 비상대비자원관리법의 내
용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1999.2.28. 법률 제5846호로 폐지되었다.
3) 物資動員
물자동원에 관해서도 전쟁 이전에 제정된 법령이 없다가 전쟁발발 이후 上記한
1950.7.26. 대통령긴급명령 제6호 徵發에관한特別措置令 및 1950.8.21. 대통령령 제
381호 徵發補償令에 의해 규율되었다. 1950.7.3. 육군본부에 설치된 민사부에서 각
종차량과 각종선박 등의 징발업무를 수행하였는데30), 전쟁발발후 1955년까지 도합
약 2억4천만평의 토지를 징발하였다가 약 1억4천만평을 해제하였고, 전쟁기간 중
선박 337척, 각종차량 2854대를 동원하였다.31)
징발에 대한 보상은 징발목적물의 원상회복이 불가능하거나 소모품인 경우에는
징발당시의 시가에 준하여 보상사정위원회의 査定에 따라 현물 또는 금액으로 지급
하되, 징발당시의 시가와 査定時의 시가가 현저히 다를 때에는 후자를 참작하여야
하고(위 징발보상령 제2조), 징발목적물이 부동산 등으로서 소모품이 아닌 경우에는
징발당시의 일반임대료를 기준으로 보상사정위원회의 査定에 따라 6개월마다 - 또
는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징발해제시에 일시불로 - 사용료를 지급하되, 징
30) 육군본부편찬, 위의 책, 255면. 차량에 관한 업무는 육군 병기감실에서 취급하던 전용 보류 업무를 兵器제2626호(1952년 11월20일)로 민사부에서 이관을 받고 업무를 수행하 던 중 계엄령이 해제됨에 따라 내무부 치안국에 이관되었다. 31) 육군본부 편찬, 위의 책, 1955, 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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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당시와 査定時의 일반임대료가 현저히 다를 때에는 후자를 참작하여 수시증감하
도록 되어 있었다(동령 제4조).
위 징발에관한특별조치령과 징발보상령은 1963.5.1. 법률 제1336호로 徵發法이 제
정됨으로써 폐지되었는데, 동법은 징발물에 대한 사용료의 지급기간을 매1년으로
연장하고(제19조 제5항), 보상기준을 補償時, 즉 당해 사용연도로 단순화하였으며
(제21조), 국가의 재정형편상 부득이 한 경우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보상금
을 징발보상증권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22조의 2).
그 후 1970.1.1. 법률 제2172호로 徵發財産整理에관한特別措置法이 제정되어 징발
재산 중 군사상 긴요하여 계속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 국가가 징발재산을 매수
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제2조), 징발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가 군사상 필요가 없게
된 경우 피징발자 또는 그 상속자에게 환매권을 부여하였다(제20조). 동법에 의한
환매권을 둘러싸고 6․25 전쟁 중 징발된 토지의 문제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중요한 법적 문제로 남아 있다.32)
(5) 財務․經濟行政
정부수립 후 6․25 전쟁 이전까지 이미 국회는 1948.7.17. 법률 제1호 정부조직법
을 시작으로 합계 144개의 법률제정․개정안을 의결하였었다. 그 중 행정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 (광의의) 행정조직에 관한 법률33)을 제외하고 가장 눈에 뜨이는 것
은 조세에 관한 법률이 거의 완비되었다는 점이다.34) 소득세법, 영업세법, 유흥음식
세법, 酒稅法, 入場稅法, 법인세법, 관세법, 청량음료세법, 지방세법, 馬券稅法, 통행
세법, 면허세법, 인지세법, 전기까스세법, 상속세법, 증여세법, 물품세법, 織物稅法
등 조세실체법과 국세징수법이 그것이다. 이는 건국초기 국가의 재정적 기초가 조
32) 동법에 의한 환매권에 관하여 裵柄皓, 공법상 환매권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법학박 사학위논문, 2000, 217-245면 참조. 33) 정부조직법(1948.7.17. 법률 제1호), 국군조직법(1948.11.30. 법률 제9호), 審計院法 (1948.12.4. 법률 제12호), 지방자치법(1949.7.4. 법률 제32호), 국가공무원법(1949.8.12. 법 률 제44호), 법원조직법(1949.9.26. 법률 제51호) 검찰청법(1949.12.20. 법률 제81호) 등 34) 稅關官署設置法(1949.2.9. 법률 제19호), 소득세및사업세결정에대한임시조치법(1949.5.31. 법률 제30호), 소득세법(1949.7.15. 법률 제33호), 지방세무관서설치법(1949.8.3. 법률 제 39호), 지방세에관한임시조치법(1949.8.9. 법률 제42호), 임시조세조치법(1949.8.9. 법률 제43호), 영업세법(1949.8.13. 법률 제48호), 유흥음식세법(1949.10.1. 법률 제52호), 酒稅 法(1949.10.21. 법률 제60호), 入場稅法(1949.10.21. 법률 제61호), 법인세법(1949.11.7. 법 률 제62호), 관세법(1949.11.23. 법률 제67호), 국세징수법(1949.12.20. 법률 제82호), 청량 음료세법(1949.12.20. 법률 제83호), 지방세법(1949.12.22. 법률 제84호), 馬券稅法 (1950.2.9. 법률 제92호), 통행세법(1950.2.24. 법률 제99호), 면허세법(1950.3.10. 법률 제 109호), 인지세법(1950.3.10. 법률 제110호), 전기까스세법(1950.3.10. 법률 제111호), 상속 세법(1950.3.22. 법률 제114호), 증여세법(1950.4.8. 법률 제123호), 물품세법(1950.4.10. 법 률 제124호), 織物稅法(1950.5.1. 법률 제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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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도를 조속히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쟁 기간 중 국회는 그 이전보다 더 많은 합계 148개의 법률제정․개정안을 의
결하였는데, 역시 조세에 관한 것이 단연 주종을 이룬다. 이미 제정된 위 법률들을
개정한 것은 별론으로, 새로 제정된 법률만 보더라도, 租稅臨時增徵法(1950.11.30.
법률 제154호), 地稅法(1950.12.1. 법률 제155호), 등록세법(1950.12.1. 법률 제167호),
租稅特例法(1951.1.1. 법률 제188호), 臨時地方分與稅法(1951.4.1. 법률 제192호), 조
세범처벌법(1951.5.7. 법률 제199호), 조세범처벌절차법(1951.5.7. 법률 제200호), 噸
稅法(1951.8.24. 법률 제212호), 臨時土地收得稅法(1951.9.25. 법률 제220호), 鑛稅法
(1952.12.16. 법률 제266호), 地方分與稅法(1952.8.7. 법률 제249호) 등이 그것이다.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해 稅收確保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였음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
라고 할 것이다.
財政에 관한 입법을 살펴보면, 전쟁 이전에 이미 국채법(1949.12.19. 법률 제75
호), 세입보전국채법(1949.12.19. 법률 제76호), 국유재산법(1950.4.8. 법률 제122호),
한국은행법(1950.5.5. 법률 제138호) 등이 마련되어 있었고 또한 각종 특별회계에
관한 법률들이 제정되어 있었다.35) 전쟁 기간 중에는 현재의 예산회계법에 해당하
는 財政法(1951.9.24. 법률 제217호)을 제정하여 국가재정의 기본구조를 정립하였고,
한국조폐공사법(1951.9.2. 법률 제215호)을 제정하여 화폐발행제도를 정비하였다. 전
쟁으로 인한 財政難과 經濟難을 타개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로는, 정부의 양곡수
매를 증권으로 할 수 있도록 한 糧穀證券法(1950.12.7. 법률 제171) 이외에 愛國福
券發行法(1951.5.12. 법률 제197호)․愛國福券특별회계법(1951.5.12. 법률 제198호),
國債補助券法(1951.4.1. 법률 제181호), 産業復興國債法(1952.9.28. 법률 제254호) 등
을 들 수 있다. 또한 金의 생산, 가공, 판매, 수출입을 규제하기 제정된 金에관한臨
時措置法(1951.12.23. 법률 제233호)과 화폐개혁을 위해 제정된 1953.2.15. 대통령긴
급명령 제13호 通貨에관한特別措置令 및 그 시행을 위한 緊急金融措置法(1953.2.27.
법률 제277호)이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전쟁수행 및 전란수습을 위한 비용을 특별
회계로 설치하여 다른 비용과의 혼용을 막고자 하였는데, 6․25사변수습비특별회계
법(1951.3.21. 법률 제182호)과 전란수습비특별회계법(1953.4.15. 법률 제283호)이 그
것이다. 그 이외 한미경제원조협정에의한대충자금운용특별회계법(1951.4.1. 법률 제
190호), 경제조정특별회계법(1952.12.14. 법률 제273호) 등의 특별회계법이 제정되었
35) 후생복표특별회계법(1949.8.9. 법률 제46호), 국채금특별회계법(1949.12.19. 법률 제77호), 외자특별회계법(1950.2.9. 법률 제88호), 방송사업특별회계법(1950.2.9. 법률 제89호), 전 매사업특별회계법(1950.2.9. 법률 제90호), 귀속농지관리특별회계법(1950.2.13. 법률 제93 호), 교통사업특별회계법(1950.2.13. 법률 제94호), 통신사업특별회계법(1950.2.13. 법률 제95호), 귀속재산처리특별회계법(1950.2.16. 법률 제98호), 양곡관리특별회계법(1950.5.8. 법률 제140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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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권 2호 (2000) 6․25 戰時下의 行政法 93
다.
경제행정에 관한 법률을 살펴보면, 전쟁 이전에 제정된 양곡매입법(1948.10.9. 법
률 제7호), 양곡관리법(1950.2.16. 법률 제97호), 은행법(1950.5.5. 법률 제139호)에
이어, 전쟁 중에는 침범지역내금융기관예금에관한특별조치법(1950.10.26. 법률 제149
호)과 유통질서 확립을 위한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의 모태에 해당하는) 중앙도매시
장법(1951.6.22. 법률 제207호)이 제정되었다. 또한 언급할 만한 것은 생활필수품의
생산․판매에 대한 규제를 통해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의원입법
으로 1951.4.25. 제출되었다가 결국 1954.3.25. 국회 본회의에서 폐기되어 제정되지
못한 「生必物資戰時特別措置法」案이다.36)
(6) 警察 및 一般秩序行政
경찰 및 일반질서행정 작용에 관해서는 전쟁 당시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제헌헌법 제100조에 따라 日帝의 依用法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 예로
서는 도로교통에 관한 朝鮮道路取締規則 및 朝鮮自動車取締規則, 총포․화약에 관
한 銃砲․火藥類取締令 및 射擊및射擊場取締에관한各道令, 전당포영업에 관한 質屋
의取締에관한件, 고물상영업에 관한 古物商取締에관한件, 식품위생에 관한 飮食物其
他物品取締에관한件, 料理屋․飮食店營業取締規則, 사행행위 규제를 위한 懸賞當籤
類似其他投票募集等取締에관한件 등이다.37)
이러한 依用法令들이 6․25 전쟁 당시 적용되었는데, 그 억압적 성격과 경찰의
권한남용의 문제가 많았다. 이와 관련하여 전쟁 초기인 1950.7.22. 대통령긴급명령
제8호로 非常時警察官特別懲戒令이 제정되었음이 특기할 만하다. 또한 1950.12.1.
법률 제156호로 제정된 私刑禁止法과 1951.11.17. 법률 제224호로 제정된 寄附金品
募集禁止法이 전쟁으로 인한 질서문란을 규제하기 위한 입법이었다. 경찰관의 직무
21) 이종욱 의원에 의한 동법안의 제안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6․25로 인한 경제질서의 혼 란과 이에 따른 악질모리배의 농간 등으로 민생이 극도로 도탄에 빠져 있음을 감안하 여 우선 국민생활 필수품의 생산과 수입 배급 등을 통제관리함으로써 생산의 증강과 저물가정책을 강행코자 이를 제안하는 것임”. 이에 따르면 생필품의 생산 또는 가공을 하고자 하는 자는 정부에 신청하여 등록을 하도록 하고(제6조), 공급상 필요하다고 인 정할 때에는 업자에게 책임수량의 완수를 명할 수 있으며(제7조), 생필품의 가격은 정 부가 수시로 이를 사정하여 공시하도록 하였다.(제9조) 또 수입한 생필품의 가격이 동 격의 국산품에 비하여 고가일 경우에는 그 차액을 정부가 부담하도록 하며(제13조), 생 필품은 필요수량 이상을 소지 또는 매점하지 못하되 다만 米穀 또는 麥類로서 전가족 이 1년간 사용할 식량은 예외로 하는(제15조) 규정까지 두고 있었다. 전시에 부족한 생 필품을 분배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법률이었으나 폐기되었다. 37) 1961년경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依用法令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福票發行․懸賞其他射 倖行爲團束法(1961.11.1. 법률 제762호), 전당포영업법(1961.11.1. 법률 제763호), 고물영 업법(1961.11.1. 법률 제764호), 총포화약류단속법(1961.12.13. 법률 제835호), 도로교통법 (1961.12.31. 법률 제941호), 식품위생법(1962.1.20. 법률 제1007호)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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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일반법인 警察官職務執行法은 휴전 직후의 혼란기에 경찰권 발동의 합법성
을 확보하고자 1953.12.14. 법률 제299호로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반질서행정 작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입법은 1951년 11.18. 법률 제225호
로 제정된 戰時生活改善法이다. 동법은 全文 14개조로 이루어진 단행법이지만 민간
생활을 광범위하게 규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동법의 목적은 “전시 또는 사변에
있어서 국민생활을 혁신 간소화하여 전시에 상응하는 국민정신의 앙양”으로서(제1
조), 戰時下의 식품판매업, 사치품, 심지어 복장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었다. 즉, 戰
時에 있어서는 오후 5시 이후가 아니면 음식점에서 탁주를 제외한 주류를 판매 또
는 음용할 수 없고(제3조)38),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특수음식점영업을 경영할 수 없
으며(제4조), 음식점에서 接客만을 주로 하는 부녀자를 사용할 수 없고(제5조), 음
식점에서 歌舞音曲을 할 수 없다(제6조). 뿐만 아니라, 戰時에 상응하지 않은 복장
착용을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고(제7조) 국민생활에 직접 필요하지 않은 사치품의
수입, 제조 또는 판매를 금지할 수 있는데(제8조), 해당 복장․사치품은 전시생활개
선위원회의 具申과 대통령의 지정에 의해 결정된다(제9조). 동법의 위반에 대해서는
5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고(제10조), 행위자와 함께 법인과 사업
주도 처벌되며(제11조). 소관공무원이 위반사항을 알고도 이를 묵인 또는 방임하면
1년이하의 징역 또는 5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동법이 제정된 시기는 의문의
여지없이 戰時이었으므로 발효와 동시에 적용되었고, 동법의 부칙에 의하면, 戰時의
종료는 정부의 선포에 따르게 되어 있었는데(제14조), 휴전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일정 기간 적용되다가 그후 1963.11.5. 법률 제1440호로 폐지되었다.
(7) 福祉․社會行政
건국초기와 6․25 전쟁 중의 사회․복지행정은 아직 미미한 단계이었으나, 개전
후 최초로 제정된 1950.8.4. 법률 제145호 피난민수용에관한임시조치법이 전시하의
대표적인 복지행정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軍警의
戰死傷이 증가하자 유족과 상이군경의 복지와 군대의 사기진작을 위해 警察援護法
(1951.4.12. 법률 제187호)과 戰歿軍警遺族과傷痍軍警年金法(1952.9.26. 법률 제256
호)이 제정되었고, 전선과 후방의 원활한 우편연락을 위해 군사우편법(1951.5.2. 법
률 제194호)이 제정되었다. 현행 의료법의 전신인 국민의료법(1951.9.25. 법률 제221
호)이 전시하에서 제정되었음은 특기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노동법의 4대 주요법
률인 노동쟁의조정법(1953.3.8. 법률 제279호), 노동조합법(1953.3.8. 법률 제280호),
노동위원회법(1953.3.8. 법률 제281호) 및 근로기준법(1953.5.10. 법률 제286호)이 모
38) 탁주에 대한 예외규정은 국회에서 수정된 내용이다. 그 이유는 戰時下일수록 농민이나 노동자의 능률에 관해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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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전쟁 말기 사회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단계에서 정비되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
라고 할 것이다.
- 行政救濟
가장 놀라운 사실은 법치주의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행정소송․행정심판과
국가배상에 관한 입법이 모두 전쟁 중반에 정비되었다는 점이다. 즉, 1951.8.3. 법률
제211호로 訴願法이 제정되고 이어 같은 해 8.24. 법률 제213호로 행정소송법이 제
정된 다음 곧 같은 해 9.8. 법률 제231호로 국가배상법이 제정되었다.
제헌헌법 제81조 제1항은 “대법원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명령, 규칙과 처
분이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하고,
제27조 제2항은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받은 자는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대하여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단 공무원 자신의 민사상이나 형사상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규정함으로써, 헌법상 이미 행정소송과 국가배
상의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49.9.26. 법률 제51호로 제정된 법원
조직법 제2조는 “법원은 민사소송, 형사소송, 행정소송, 선거소송 및 기타 법률적
쟁송을 심판하고 …”라고 규정하여 행정소송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정소송
의 관할, 종류, 당사자, 절차, 판결의 효력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마련되어 있
지 않다가 전시하에서 이를 정비하였다는 점은 자못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행정소송법 제정 이후 휴전 이전까지 2년이 채 되지 못한 기간 동
안 대법원의 행정소송 상고심 판결이 32건이나 선고되었음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
다.39) 그 중 주목할 만한 판결로는 대법원 1952.6.19. 선고 52누20 판결인데, 동 판
결에서 대법원은 “위법한 행정처분에 대하여 그 취소 또는 변경을 법원에 청구하는
행정소송은 그 본질에 있어 일반민사소송임에 불과하며 이는 헌법상 당연한 국민권
리로서 현행 행정소송법 시행 전에도 이를 제기할 수 있었음은 당시 시행의 법원
조직법에 의하여도 명백한 바”라고 설시하면서, 행정소송법 시행 전에 제기된 본건
행정소송에 대하여는 동법은 동법 시행 이전 3월 이내에 처분이 있는 사건부터 적
용된다는 동법 부칙 규정이 적용되지 아니한다고 판시하였다.
Ⅲ. 戰爭과 法治主義
- 戰爭의 正當性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당한 전쟁의 세 가지 요건으로, 첫째 정당한 공적
39) 법원도서관이 제작한 「법고을」(LX 7.5 2000.1.)의 판례자료를 검색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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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의해 수행될 것(auctoritas principis), 둘째 정당한 이유를 가질 것(iusta
causa), 셋째 올바른 의도를 가질 것(intentio recta)을 주장하였다.40) 앞의 두 개의
요건은 전쟁 자체 또는 開戰의 정당성(ius ad bellum)에 관한 것인 반면, 세 번째
요건은 주로 전쟁수행 과정의 정당성(ius in bello)에 관한 것으로서, 구체적인 전투
수단의 정당성 문제로 연결된다. 현대에 이르러 전투수단의 정당성에 관해서는 比
例原則(proportionality), 區別原則(discrimination) 및 二重效果原則(double effect)이
제시된다.41) 비례원칙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요․최소한도의 수단을 사
용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구별원칙은 전투의 대상에 있어 군인․전투원과 민간인․
비전투원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중효과원칙은 구별원칙의 예외로서, 군인․
전투원에 대한 공격으로 인한 非意圖的, 부수적 효과로서 민간인․비전투원에 대해
불가피하게 피해를 야기하는 것은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神法으로부터 출
발하여 그로티우스의 (理性的) 自然法을 거쳐 1,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국제법
의 일반원칙」으로 정립되었다. 특히 전쟁의 정당한 이유와 관련하여 침략적 전쟁은
부인되고 방어적 전쟁만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우리 헌법 제5조 제1항).
오늘날은 일찍이 칸트가 「영구평화를 위하여」(Zum ewigen Frieden)에서 주창한
세계평화의 이념이 핵무기 시대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42)
- 戰爭의 正當性과 法治主義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원래 원시시대로부터 적나라한 폭력의 영역으로
서 규범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었는데,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神法과 自然法을 근
거로 그 정당성에 관한 규범적 평가를 점차 시도하게 되었고, 그러한 「전쟁법」은
20세기에 들어와 국제법적 차원에서 규범으로 정립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전쟁의 정당성도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이고, 전투수단의 정당성에 관한 비
례․구별․이중효과의 원칙들도 교전상대국 국민에 대한 관계에서만 논의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20세기를 돌이켜 보면, 특히 그 후반 50년은 人類史 전체에서 국민의 기
40) Th. Aquinas, Summa Theologiæ, 2a2æ 40.(Th. Gilby ed., London 1966) Vol. 35 81-85면). 41) R. Chadwick(ed.), Encyclopedia of Applied Ethics, Vol. 4., San Diego[Academic Press], 1998, 501-503면 참조. 42) 전쟁에 관한 법철학적 논의에 관해서는 G. Radbruch, Rechtsphilosophie, Studienaus- gabe(hrsg. v. Dreier/ Paulson), Heidelberg 1999, S.188-192; A. Kaufmann, Rechts- philosophie, 2.Aufl., München 1997, S.248-2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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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권 보장과 국가권력의 법적 구속을 핵심으로 하는 법치주의가 확립되는 시기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50년간 갖은 정치적․경제적 난관을 뚫
고 이제 “손색없는” 법치주의가 정립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전쟁의 정당성도 -
神法, 自然法, 國際法의 차원을 거쳐 - 국내 공법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할 단계에
왔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 개시의 결정권한, 전쟁의 목적․이유, 전쟁의 수
단 등은 이제 自國民의 기본권 보장과 국가권력의 법적 구속의 관점에서도 정당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 戰爭에 대한 法治主義의 要請
(1) 豫測可能性과 法的安定性
법치주의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졌었다. 영국의 전통적인 「
법의 지배」(rule of law)원리는 모든 개인이 - 행정관료를 포함하여 - 그 권리․
의무에 관해 일반법원의 재판을 통해 정립되는 일반법(ordinary law)에 평등하게
복종한다는 것으로서, 그 핵심은 平等과 司法中心이라고 할 수 있다.43) 독일의 법
치국가 원리는 한편으로 특히 19세기 중반 국가주의를 배경으로 국가권력의 권위와
실효성을 법에 의해 담보한다는 소위 권위적 법치국가(autoritärer Rechtsstaat)와,
다른 한편으로 국가․사회 이원론에 입각하여 법에 의해 국가권력을 구속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자유적 법치국가(liberaler Rechtsstaat)라는 상반된 전통
을 갖고 있다.44) 이것은 바로 국가권력에 대한 관계에서 법이 갖는 二重性을 의미
한다. 사실 행정법은 한편으로 행정권을 제한하는 기능과 다른 한편으로 - 특히
법률유보와 관련하여 - 행정권 발동 및 制裁의 근거를 마련해 줌으로써 그 실효
성을 담보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를 전쟁과 법치주의의 관계에서 본다면,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기능으로 인해 원활한 전쟁 수행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권력에 권위와 강제수단을 부여하는 기능으로 인해 강압적․자
의적인 전쟁 수행을 조장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나라한 현실(Sein)
인 전쟁은 규범(Sollen)으로서의 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전쟁은
법치주의의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이와 같은 법치주의의 多義性과 矛盾性과 限界性을 극복하는 길은 - 시대와 국
43) A.V. Dicey,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 of the Constitution, 8.ed., London 1915(Reprint; Indianapolis [Liberty Fund] 1982), p.120-122; 안경환 외 역, 헌법학입문, 경세원, 1993, 121-123면 참조. 44) 독일의 법치국가 관념의 역사에 관해 E. Šarčević, Der Rechtsstaat, Leipzig 1996, S.6-57; K. Sobota, Das Prinzip Rechtsstaat, Tübingen 1997, S.263-396; E. Schmidt-Aßmann, Der Rechtsstaat, in: Isensee/ Kirchhof(Hrsg.), Handbuch des Staatsrechts, Bd.I. 2.Aufl., Heidelberg 1995, §24 Rn.10-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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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따른 발전내용을 捨象하고 - 법치주의 관념의 원래적 의미로 돌아가는 것이
다. 법치주의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에 미리 그에 관한 명확한 규칙을 정립
해 두고 그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그 규칙에 의거하여 해결한다는 데에 핵심적 의
미가 있다. 이로써 豫測可能性과 法的安定性을 확보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전
쟁과 법치주의는 만나게 된다. 법이 국가․사회의 공동체생활에 대한 인간 지혜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또한 인간의 지혜는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 대해서도 오히려
더욱더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미리 - 평시이든 전시이든 간에 - 가능한 한 전
쟁의 모든 상황을 예상하여 그에 관한 행동규칙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전쟁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과정에서 민간의 심리적 안
정을 확보함으로써 결국 국가의 전쟁수행능력을 제고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2) 比例原則
법치주의의 제1요소가 문제발생 이전에 미리 그에 관한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라
면, 제2요소는 그 규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목적 달성에 적합하
고 필요하며 상당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비례원칙은 19세기 후반 독일 경찰법
의 원칙으로 출발하여 20세기에 들어 행정법의 일반원칙을 거쳐 헌법상 기본권 제
한의 한계에 관한 원칙으로 발전하고 현재에는 유럽공동체의 법원칙으로까지 승인
되고 있다.45) 우리나라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에서도 비례원칙은 의심의 여
지가 없는 법원칙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비례원칙이 이미 전쟁수단의 정당성
에 관한 전쟁(국제)법의 원칙으로 정립되어 있음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바로 이
것이 국제법으로서의 전쟁법과 국내 공법을 연결하는 맥점이다. 다시 말해, 전쟁수
행 수단이 교전상대국에 대하여 비례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면, 이는 自國의 법질서
와 국민의 권리․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례원칙은 그 규범구조상 어떠한 비상사태도 모두 법의 세계로 포
섭하는 힘을 갖고 있다. 비례원칙의 요체는 목적과 수단의 형량, 궁극적으로는 대립
하는 가치들의 형량에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 하에서도,
심지어 전쟁 상황 하에서도, 그로 인해 돌출․강조되는 가치들 앞에서 비례원칙은
결코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들을 자신의 규범내용 속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례원칙은 다른 어떤 법원리와도 형량될 수 없는 절대적 법원칙
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대립하는 가치들을 형량해야 한다는 규범
45) L. Hirschberg, Der Grundsatz der Verhältnismäßigkeit, Göttingen 1981, S.2-36; H. Kutscher, Zum Grundsatz der Verhältnismäßigkeit im Recht der Europäischen Gemeinscahften, in: Deutsche Sektion der Internationalen Juristen-Kommision (Hrsg.), Der Grundsatz der Verhältnismäßigkeit in europäischen Rechtsordnungen, Heidelberg 1985, S.8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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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46)
이러한 비례원칙은 전쟁과 법치주의의 관계에서 戰時立法의 기준과 한계를 이루
고 이는 결국 헌법 제37조 제2항의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
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자명한 법리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쟁 중에도 헌법은, 특히 위 제37조
제2항은, 제한없이 유효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법치주의는
전쟁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이다.
요컨대, 전쟁에 대한 법치주의의 요청은, 위 제1요소와 제2요소를 종합하면, 전쟁
상황에 적용되는 법령을 - 일반적인 법령도 물론 포함하여 - 완비하되, 그 제정
과 시행에 불가피한 기본권 제한을 전쟁 수행에 적합하고 필요하며 상당한 범위
내로 한정하는 데 있다. 이로써 전쟁 수행에 관한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대외
적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되고, 이는 결국 國力의 중요한 요소가 된
다.
(3) 目的의 正當性
법치주의의 대원칙으로서 비례원칙이 갖는 필수불가결한 전제는 목적-수단관계
의 형량에 앞서 그 목적 자체가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법치주의
의 第三要素이다. 헌법 제5조 제1항에 의해 침략적 전쟁은 배제된다. 방위를 위한
전쟁이 개시되고 나면 그 정당한 목적은 결국 「전쟁의 승리」일 수밖에 없겠으나,
어떻게 어느 정도로 승리하느냐 라는, 말하자면, 「중간목적」의 정당성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흔히 (방위적) 전쟁의 개시 및 수행의 정당한 목적으로 “국익”이 제시된다. 헌법
제37조 제2항도 기본권 제한사유로서 질서유지와 공공복리와 구별하여 “국가안전보
장”을 들고 있다. 만일 이러한 국가안보 내지 국익이 공법의 실질적 징표인 「공익」
과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이는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잔재가 완전히 불식
되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국가안보” 또는 “국익”이 사실
상 단지 정권 유지를 위한 것이거나, 심지어 소수의 - 예컨대 군국주의에 있어 재
벌기업의 - 私益을 위한 것으로 誤用되기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러한
“국익”이 전쟁의 정당성으로 사용된다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쟁에 대한 진정한 법치주의의 요청은 바로 이러한 “국익” 개념의 허구적 위험
성을 극복하는 데 있다. 국가의 존재근거 자체가 인간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면, 그 국가의 존립․안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쟁의 개시 및 수행도 그 공
46) 비례원칙의 규범구조에 관해 拙著, Rechtsfindung im Verwaltungsrecht, Berlin 1999, S.268-2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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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안보”와 “국익”은 - 질
서유지와 공공복리와 함께 - 「공익」으로 통합되어야 한다.47) 이러한 통합개념으로
서의 공익은 「개방적」 「상대적」 개념이다. 즉, 일정한 가치대립 상황에서 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보다 더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공익이다. 그것의 판단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Konsens) 내지 합의가능성
(Konsensfähigkeit)을 지향하고 항상 비판․토론에 열려 있는, 그러한 의미에서 공
공성(Öffentlichkeit)을 기초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48) 물론 이러한 공익 개념도 여
전히 허구적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국익을 공익으로 통합하는 것
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전쟁 개시와 수행을 위한 기본권 제
한의 한계 문제는 비례원칙의 전제로서 목적의 정당성 관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
을지라도, 평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방위적) 전쟁
의 개시 내지 응전 또는 확전의 문제, 전쟁수행 과정에서 군사적 또는 대민간적 전
략․전술․작전․무기사용의 문제에 있어 먼저 공익의 관점에서 그 목적의 정당성
이 검토되어야 하고 또한 검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비례원칙은 적용되
는 것이다.
(4) 權利救濟와 適法性 統制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 비례원칙에 의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 법치주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권리구제와 적법성 통제의 가능성은 열려 있어야 한다. 권리구
제와 적법성 통제는 법치주의 실천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第四要素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사법심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 의한 통제와 행정부의 자
기통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법심사 - 특히 행정소송과 헌법소원 -
에 관해서 보면, 그 관할과 절차가 계엄법에 의해 수정․제한된다 하더라도, 그것도
비례원칙에 의거한 것이어야 함과 동시에, 사법심사 가능성 자체는 보장되어야 한
다.
이른바 「統治行爲」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형량․조화의 문제로서,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통해 충분히 통제될 수 있는 것에 대하여는 사법심사를 자제함으로써
민주주의적․정치적 통제 메커니즘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사법부의 정치화를 방지하
기 위해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49) 따라서 헌법상 국회의 관여가 보장되어 있
는 선전포고(제60조 제1항: 국회의 동의)와 계엄선포(제77조 제5항: 국회의 해제요
47) 同旨 崔松和, 公益槪念의 法問題化: 行政法的 問題로서의 公益, 서울대학교 법학 제40 권 제2호, 1998, 27-50면(33). 48) 拙稿, 判例의 法源性, 法實踐의 諸問題 - 東泉金寅燮변호사화갑기념, 박영사 1996.12. 1-26면(23); 行政法의 法源, 행정법연구 제4호, 1999.4. 33-64면(64) 참조. 49) 拙稿, 행정법, 법학의 이해(共著), 길안사, 1998, 26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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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 관해서만 통치행위가 인정되어야 하고, 전쟁수행과 계엄집행을 위한 구체적
수단은 사법심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아니 된다.50) 전쟁 상황의 특수성은 입
법재량과 행정재량에 관한 사법심사의 강도의 문제로 본안에서 고려되는 것이다.
권리구제의 중요한 요소로서 행정상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은 戰時에 - 특히 손
실보상에 관해 - 국가의 재정상태를 고려하여 비례원칙상 필요한 경우에는 잠정적
으로 유보하되, 소멸시효기간을 전쟁 종료 후 진행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피해자 또는 유족의 생계에 필요한 부분은 사후정산을 조건으로 즉시
지급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에는, 軍警에 대해서는 물론 민
간인에 대해서도, 전쟁으로 인한 모든 신체적․재산적 손실에 대해 통상적인 경우
보다 가중하여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입법이 미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
다. 이 또한 비례원칙의 - 말하자면, 역방향의 - 적용이다. 즉, 전쟁 상황이 제거
된 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감수에 대해서는 그만큼 권리구제의 폭도 확대되어야 한
다. 이러한 행정상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은 전쟁 중 軍․民의 심리적 안정과 전쟁
수행에 대한 합의(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5) 民主主義的․政治的 統制
위에서 통치행위와 관련하여 지적한 바와 같이,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에 대한 적
법성 통제에 관하여 민주주의적․정치적 통제에 의한 補完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법치주의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참되고 좋으며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위한
인간 지혜의 산물이라면, 이러한 공동체 생활을 떠받치는 민주주의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광장은 의회이다. 따라서 전쟁 중일수록 - 비
례원칙에 의해 법치주의의 강도가 약화되는 만큼 - 국회는 활성화되어야 하는 것
이다. 이것이 법치주의의 第五要素이자 최후의 요소이다.
Ⅳ. 6․25 戰爭에 대한 行政法的 評價
이상에서 논의한 전쟁에 대한 법치주의의 다섯 가지 요소에 의거하여 6․25 전
쟁에 대한 행정법적 평가를 시도하기로 한다. 역사의 서술은 어렵지만 안전한 반면,
역사의 평가는 쉽지만 위험하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50) 同旨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현행 국방관계 법령의 전시 시행에 관한 제 문제점 연구, 1998, 30면: “계엄법에 대해서도 선포행위 자체와 계엄선포에 따르는 계엄집행상 의 행위를 구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됨을 법적으로 명백히 규정하 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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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초기 행정작용과 행정구제에 관한 일반적인 법률도 채 정비되지 않은 상
태에서 6․25 전쟁을 맞았기 때문에, 전쟁대비를 위한 법률은 물론 전쟁수행을 위
한 법률을 미리 제정하지 못하였음은 당연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 대통령긴급명령
들을 통해 위기에 대처하고 이어 휴전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전시특별법들을 제
정하였지만, 예측가능성과 법적안정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매우 부족하였다고 할 것
이다. 그러나 전시하에 행정소송법, 소원법, 국가배상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조합
법, 노동위원회법, 근로기준법 등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법률들이 제정되었
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전쟁 중에도 국가제도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한 정부․국회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전쟁 수행을 위해서도 법치주의가 그
토록 중요하였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 전쟁 중 제정된 전시특례법이 과연 비례원칙의 관점에서 법치주의의 요청을
충족하였는가를 현재의 시점에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國民防衛軍設置法
(1950.12.21. 법률 제172호)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非常事態下의犯罪處罰에관한特別
措置令(1950.6․25. 대통령긴급명령 제1호)과 附逆行爲特別處理法(1950.12.1. 법률
제157호)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극형에 처해졌음은 역사상 분명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徵發에관한特別措置令(1950.7.26. 대통령긴급명령 제6호), 戰
時勤勞動員法(1953.6.3. 법률 제292호) 및 戰時生活改善法(1951년 11.18. 법률 제225
호)의 규정 중에는 과도한 내용이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적지 않다. 이에 관한 구
체적 검토는 장래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 목적의 정당성에 관해서는, 開戰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擴戰, 휴전협상의 지연, 네이팜탄 사용, 핵무기 동원 주장 등은 -
비례원칙의 관점에서는 물론 - 과연 그 목적이 「공익」의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
는가를 진지하게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1952.4. 비상계엄이 완전 해제되었다
가 다시 같은해 5.25. 오직 직선제 개헌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그후의 정
치적 목적을 위한 계엄령 남용의 선례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비판을 면할 수 없
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그후의 전쟁 계속 내지 휴전협상 지연이 “정권안
보”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라는 의구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 권리구제 내지 사법심사에 관해서는, 대법원이 1953.6.10. 계엄법 제13조에 대
해 위헌제청하였으며 전쟁 기간 중 행정소송 상고심판결이 도합 32건 선고되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행정소송법 시행 이전에도 헌법과 법원조
직법에 의거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시한 대법원 판결은 우리 행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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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전쟁피해로 인한 국가배상과 손실
보상 부분은 극히 불충분하였다고 할 것이다. 물론 전쟁기간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
도 지속된 열악한 재정상태를 감안할 수 있겠으나, 특히 징발보상에 관해 전후에도
상당기간 이렇다 할 새로운 입법이나 조치가 없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60년
대에 이르러 제정된 징발법이나 1970년에 제정된 징발재산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에
의해서도 6․25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심지어 그 법적
문제는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전쟁 기간 중 軍警의 戰死傷에 대해서도 완전한 재산적․정신적 보상이 이루어
지지 못해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는 점은 1990년대에 이르러 6․25 전
쟁으로 인한 戰死傷 피해에 대해 국가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된 사실에서 엿볼 수 있
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 1994.3.22. 선고 93다55067(93다55074 등 병합) 판결은 다
음과 같이 판시한 원심판결을 확정하여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하였다.
“설사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국제적인 정세와 국내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국방정책이나 국방외교를 수행하는 면에 있어서나 군비를 확충
하는 면에 있어서 적절하지 대처하지 못한 점이 있었고 또 위 전쟁 당시 국방부장관
과 육군참모장으로 재직하던 위 신성모와 채병덕이 전쟁 중의 작전을 적절하게 수행
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사정만으로는 위 이승만 대통령이나 위 신
성모, 채병덕의 행위가 법령에 위배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
라, 또 위와 같은 사정만으로 인하여 원고 등이 전사상을 입게 되었다고도 볼 수 없
는 것”(이다).
- 전쟁 기간 중 국회는 입법의사록과 헌법개정회의록 등에 비추어 활발히 운영
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전시특례법의 입법과정에서 정부안을 구체적으로 검토․
수정하고 1951년 제출된 전시근로동원법안에 대해서는 代案까지 제출하였다. 특기
할 만한 것은 1950.9.6. 이규갑 외 53인의 의원들이 6․25 전쟁수행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국방부 장관의 파면 요청을 결의한 사실이다. 다음은 그 결의안 중의 일
부이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방의 중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6․25의 북괴의 대규모
불법남침을 전연 예지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6월 24일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대부분의 장병을 외출케 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하였고, 수도방위에 있어
서 6월27일 허위로 의정부 탈환을 선전하고 한강철교를 절단하여 수많은 애국동포의
피난길을 막았고, 정부 중요기관의 질서있는 이전을 방해함으로써 이적의 결과를 초
래한 것은 오직 신 장관의 무위무책과 무도한 망단이다. 국회는 오늘날의 국내외 정
세를 감안하여 문책은 될 수 있는 대로 승전 후로 미루기로 하였으나 … 국가민족을
위해 부득이 더 기다릴 수 없어 직접 문책 파면할 것을 요구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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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現在의 課題
- 戰時對備法과 戰時特例法의 整備
앞으로 예상되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 북한뿐만 아니라 외국과
의 - 전쟁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법치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는 특히 그 제1요소인 예측가능성과 법적안정성을 위해 전시대비법과 전시특례법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1) 戰時對備法
전시대비법이라 함은 전쟁에 대비하여 평시에 (예비)병력을 훈련시키거나 전쟁동
원에 대비하여 자원을 관리․유지하는 데 필요한 법령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
합방위법(1997.1.13. 법률 제5264호)과 비상대비자원관리법(1984.8.4. 법률 제3745호)
이다. 통합방위법은 국군, 경찰, 국가기관 및 자치단체, 향토예비군, 민방위대 등 각
종 국가 방위요소들의 비상시 통합운영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비상대비자원관리법
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시에 인력자원과 물적자원을 활용하는 데 대
비하기 위한 계획의 수립, 자원의 조사 및 훈련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2) 戰時特例法
주목하여야 할 것은 전시특례법이다. 이는 전시에 비로소 시행․적용된다는 점이
전시대비법과 다르다. 계엄법을 제외한 모든 전시특례법은 현재 국무회의 의결만
거쳐 법률안 혹은 대통령 긴급명령안으로 준비된 상태로 있는데, 戰時에 비로소 국
회를 통과하여 법률로 제정․공포되거나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제정․공포될 예정
이다. 문제는 이들 전시특례법 전부가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명칭만 공개되어 있을
뿐 그 내용 전부는 공개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전시자원동원에관한법률, 전시행
정조직에관한임시특례법, 전시공무원의인사및연금에관한임시특례법, 전시금융․통화
에관한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전시예산체계에관한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전
시외국환관리에대한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전시재정․경제에관한임시특례법, 전
시정부업무운영등에관한임시특례법, 전시법원․검찰조직및사법운영에관한임시특례
법 및 동 대통령긴급명령, 전시헌법재판소의조직및운영에관한임시특례법 및 동 대
통령긴급명령, 전시범죄처벌에관한임시특례법 및 동 대통령긴급명령, 포획심판에관
한법률 및 동 대통령긴급명령 등이 그것이다.52)
51) 한국국회사무처, 국회사 제헌-6대국회, 1971, 383면. 52)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국방관계 법령의 전시 시행에 관한 제문제점 연구, 1998, 4면; 이상철, 국가 위기관리 법령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육사논문집 제55집 1권, 19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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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비상국가동원체제에 관한 법률이 평시에 국회를 통과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없지 않겠지만, 그 내용 전부가 비밀로 분류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
에, 위에서 강조한 법치주의의 제1요소로서 예측가능성과 법적안정성 요청에 따라,
군사비밀에 속하지 않는 부분은, 또는 최소한 그 기본적 내용이라도, 미리 법률로
제정․공포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효율적인 측면에서도 국민들과 관계공무원
들이 그 주요내용을 미리 숙지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그 내용
모두를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국회와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의구심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전시의 금융․통화, 예산체계 및 외국환관리에 대하여
는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의 제정만이 예정되어 있는데, 대통령의 긴급명령은
전시하에서도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그것도 최소한으로
필요한 내용으로만 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원칙적으로 법률로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할 점은 정보공개제도를 통해 이들 법률안과 대통령
긴급명령안 문서들이 공개될 수 있는가 여부이다. 현행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
법률에 의하면 이들 문서들을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것이라는 이유로 공개가 거부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53) 만일 동법에 의한 공개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국회의 관
계 상임위원회에 의한 사전 검토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기밀사항이라 하
더라도 국회의 국정조사․국정감사 및 감사원감사와 국회의 대정부질문 등의 경우
에는 한정적 공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54)
또한 전시특례법에 관해 지적해야 할 것은 전시체제에서 다시 평시로 전환되는
시점이 명확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6․25 전쟁 당시 전시특례법은 이
러한 규정이 불명확하여 휴전 이후에도 여전히 적용된 예가 없지 않았다. 가장 대
표적인 예가 징발에관한특별조치령과 전시생활개선법이었다.
263-298면 참조. 53) 동법 제4조 제3항은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 및 보안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서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분석을 목적으로 수집되거나 작성된 정보에 대하여는 동법 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동법 제7조 제1항 1호는 “다른 법률 또는 법률에 의 한 명령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되거나 비공개사항으로 규정된 정보”를, 다시 2호에서 “공개될 경우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외교관계 등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 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비공개대상정보로 규정하여 이중으로 정보공개청구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러한 규정이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제정된 기존 의 국가기밀 관련 법체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성낙인, 정보공개법의 제정과 운용방향, 공법연구 제25집 제4호, 1997.6. 196면. 54) 慶 健, 정보공개청구제도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26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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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戒嚴法의 整備
계엄법도 전시 기타 비상시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비로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
에 전시특례법의 일종이다. 현행 계엄법의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첫째,
헌법상 계엄선포에 관해 국회가 사전동의권은 없고 사후적으로 해제를 요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제77조 제5항). 계엄선포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진정으로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인지 여부를 국회가 결정하도록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계엄법은 - 6․25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
로 - 제9조 제1항에서 비상계엄시 계엄사령관의 체포․구금․압수․수색․거주․
언론․출판․집회․결사 또는 단체행동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만 규
정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규정이 없다. 예측가능성과 비례원칙상
문제의 소지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하루빨리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 結語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결국 6․25 전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에는 전쟁 기간
중 최소한 법치주의의 틀을 갖추고자 한 노력이 기여한 바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
다. 그후 50년간 우리나라는 20세기에 식민지지배를 거쳐 독립한 국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치적 혼란과 독재, 경제적 난관, 남북의 분단에도 불구하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爭取하여 발전시켜 왔다. 이제 새천년 21세기에 들어 민족의 화해와 화
합,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단계에서, 그 디딤돌은 바로 법치주의와 민
주주의의 확립에 있음을 깨닫는 동시에, 그것은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 하에서도
타당하다는 점을 되새기는 것이 6․25 전쟁에 대한 행정법적 조명의 가장 큰 의의
라고 할 것이다.